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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현지 May 09. 2019

10. 배낭 속 애물단지

그랬다면 나의 연애는 조금 달라졌을까



배낭 속 애물단지



불볕더위가 연일 이어지는 남인도 고아. 누가 ‘고아 얼마나 더워요?’ 하고 물어본다면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드라이기를 입에 물고 있는 것처럼 덥다’고 말해 줄 테다. 북인도에 있을 때는 아무리 더워도 콜라 한 잔 쭉~들이키면 어느 정도 열기가 가시곤 했는데 남인도에선 기껏 비싼 돈 들여 얼음물을 사 마셔 봐도 10분이면 다시 이마에 땀이 주르륵 흐를 정도.


상황이 이쯤 되니 북인도에서 내내 껴입고 있던 긴 소매 옷들이 순식간에 애물단지가 됐다. 유용하게 쓰던 얇은 패딩도, 애지중지 아끼던 바람막이도 여기선 아무 소용이 없는 거니까. 하지만 이 중에서도 가장 최고로 귀찮은 존재는 바로,


“이놈의 후드티!! 확 그냥 버려 버릴까 보다!!”


기모가 짱짱하게 달린 후드티였다. 이 날씨에 이걸 입고 다니기엔 거의 자살 행위에 가까웠고, 그렇다고 막상 쓰레기통에 처넣자니 다시 북으로 올라갔을 때 아쉬워질 게 뻔해 맘 편히 버릴 수도 없었다. 그렇게 내 검은색 후드티는 남인도를 여행하는 내내 배낭 한구석에 쿡 처박혀 조금씩 조금씩 폴폴 쉰내를 풍겨대기 시작했다.




대학교 1학년 시절. 당시에 잠시 만났던 남자 친구가 있었다. 꽤 괜찮은 외모에 자상한 성격, 거기다 노래까지 잘해서 내심 ‘내가 이런 남자의 여자 친구라니’ 싶은 마음이 들어 주변에 자랑스레 소개하기도 했었다. 

허나, 그저 즐거운 로맨스 코미디라 여겼던 내 연애가 짠내 나는 다큐멘터리로 변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무슨 연애 한 번 하는데 싸울 일이 그렇게도 많으며 어린애들의 사랑 싸움에 왜 그의 부모님까지 개입해 훈수를 두시는 건지. 누군 없는 돈 쪼개가며 제게 선물을 안기고, 또 누군 1,000원 마트에서 산 싸구려 인형 하나를 기념일 선물이랍시고 던지는 그 지긋지긋한 패턴의 반복.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여자인가.’


받는 것 없이 끊임없이 베풀기만 하던 내 스물의 상처는 결국 자존감의 문제로까지 번졌다. 나에게 천 원짜리 한 장 쓰는 것도 아까워하는 남자. 어쩌다가 뭐 하나 사 주기라도 하는 날엔 몇 날 며칠이고 ‘그때 나랑 같이 먹은 거 기억하지? 그거 좀 비싼 거였어.’ 하며 생색내는 인사. 알고 보면 없는 형편에 먹을 거며 선물이며 사 줘도 내가 훨씬 더 많이 사다 줬건만, 고마운 줄도 모르고 제가 내게 베풀어 준 것들만 쏙쏙 골라 기억하던 못난 인간과의 찌질했던 연애.


그러다가 결국 생각했지.

이렇게까지 해 가면서까지 이 남자를 만날 필요가 있을까?

내 피 같은 돈을 써가며 저런 놈을 배를 불려 주느니, 차라리 그 에너지를 나 자신에게 투자하는 게 훨씬 더 나은 방법인 거 아닐까.


그렇게 결국, 그 연애는 얼마 가지 않아 그다지 아름답지 못한 방법으로 끝을 맞았다.


그런데 사귄 기간에 비해 그 연애의 후유증이 생각보다 참 오래가더라. 똥 밟았다 치자며 쉽게 잊어버리기엔 당시에 내 멘탈이 너무 약했는진 몰라도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따금 그때 일들이 불쑥 생각이 나더라고. 늘 계산할 때만 되면 우물쭈물 뒤로 슬쩍 빠지던 그 모습과 이 세상에서 제 아들만 잘난 줄 알던 그 엄마의 말도 안 되는 갑질과 폭언들이.


이제는 잊을 때도 됐는데.

쪽팔린다고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채 거의 10년씩이나 그렇게 방치를 했더니 결국 그 상처가 곪고 곪아 내 안에서 썩은 내를 풀풀 풍겨댔다. 쿨하게 잊지도, 아름답게 포장해 주지도 못한 채.





“아오! 어떻게 된 게 짜도 짜도 계속 나와!!!”

이 후드티를 그대로 뒀다간 배낭 안에서 곰팡이가 피고야 말겠다 싶어 아주 큰맘을 먹고 손빨래를 시작했다. 그런데 세탁까진 어찌어찌 했는데 그다음이 문제다. 어떻게 된 게 도무지 짜도 짜도 물 빠짐이 끊이질 않는 거다. 빨래를 비틀고 또 비틀다 보니 손목이 저려 오고, 탈수를 하느라 지친 손바닥은 쓸리고 쓸려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아 힘들어. 걍 이대로 대충 말릴까?”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절대로 포기 안 해. 오늘에야말로 너랑 나, 아주 끝장을 보자.

더 이상 내 배낭 속에서 된장 꼬린 내를 풍기지 못하게 해 주겠어.

내 오늘 너를 탈탈 털어 햇빛에 쨍하게 말려 줄 테니 각오 단단히 하거라!


가끔 그런 생각을 해 본다. 만약 내가 혼자 끙끙 삭히지 말고 내 친한 친구에게라도 고민을 속 시원히 털어놨더라면 어땠을까. 그 남자의 부모님에게 영문 모를 폭언을 들었던 날, 혼자 숨어서 울지 말고 엄마한테만이라도 상담을 했더라면. 그랬다면 나의 연애는 조금 달라졌을까. 아니면 그보다 더 구질구질하게 깨졌으려나.


마음에 상처가 생겼을 때는 무턱대고 피한다거나 무작정 덮어 놓지 말고, 한 번쯤은 대담히 부딪혀 보는 것도 꽤 괜찮은 방법인 것 같다. 가령, 혼자 꽁해 있지 말고 ‘야!! 양심도 없냐?? 웬만하면 이번엔 너도 좀 내!’ 하고 질러 본다거나, 혹은 친구들을 만나 ‘아 그 개자식이 글쎄!!’ 하고 속 시원히 토해내 보는 것과 같은 뭐 그런 거. 물론 그러려면 자신의 궁상맞은 현실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내는 고통을 감수하긴 해야겠지만, 그래도 눈물을 참으면서까지 괜찮은 척하고 있는 것보다야 속 시원히 터트려 버리는 게 훨씬 더 나은 방법이지 않을까.


그리고 혹시 또 아나. 그렇게 속 시원히 쥐어짜 비틀어 버리고 나면, 훗날 시간이 흐른 뒤 그 구질 했던 기억조차 ‘나름대로 괜찮은 추억이었어.’라며 포장이 가능해질지도.


격렬했던 물기 짜기 작업이 끝난 후, 난간에 축 늘어져 있는 후드티를 보며 생각한다.

좀 힘들었지만, 그래도 잘한 거야. 구역질이 나던 그 쉰내, 더러운 구정물. 너를 볼 때마다 내쉬었던 그 한숨들까지.


이젠 진짜로, 진짜로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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