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탓이 아닌데 어떡해’ 사랑받고 자란 사람들은 티가 난다는 말
사랑받고 자란 사람들은
기가 살아 있고 빛이 난다는 말
저는 정서적 흙수저입니다. 지지와 다독임 그리고 칭찬이 풍성한 어린 시절을 보내지 못했거든요. 엄한 아버지와 무뚝뚝한 어머니 아래에서 강요와 비난이 더 많았으니까요.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원하는 만큼 충분히 사랑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떠올릴 때면 아직까지도 아쉽고 서럽고 억울하고 그래서 화도 납니다.
사랑받고 자란 사람들은 티가 난다는 말이 참 속상했습니다.
그들은 기가 살아있고, 빛이 난다고.
저도 사회생활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있고, 그중에는 겉으로는 활발하고 자존감이 높은 것처럼 보이지만 조금만 더 가까이서 지켜보면 나약한 내면을 밝고 강한 모습으로 포장하는데 에너지를 쏟느라 힘겨워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사랑 많이 받고 자랐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같이 있으면 편안하고 긍정의 에너지가 전달되어 저 또한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이처럼 나의 관계 역사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나게 됩니다.
관계 안에서 예민하게 반응하고 소심하게 걱정하거나 고민하고 있을 때면, 더욱더 부모님을 원망하게 되곤 했습니다. 심리학을 공부하지 전에는 스스로를 탓했다면, 심리학을 공부하고 나서는 부모님에 대한 원망이 커졌습니다. 어린 시절 지지와 다독임을 충분히 받았다면 타인에게 버림받을까 봐 불안해하기보다는 균형 잡힌 시각 안에서 살아갈 수 있었을 테니까요.
내가 가진 것이 많다면 나 또한 나눠줄 수 있는 것이 많겠지요. 내가 가진 것이 별로 없고 결핍이 있다면 그 이유는 부모로부터 받지 못해서라고 믿었습니다.
가진 것보다는 가지지 못한 것에 더 마음이 쏠렸습니다.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결핍은 늘 나를 아프게 자극하니 그쪽에 더 신경이 쓰이고 마음이 가는 것이 당연한 이치입니다.
하지만 성인이 된 지금은 이런 말을 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내가 가지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내 노력으로 그것을 보충할 수 있는 힘을 내가 갖고 있기 때문이지요. 아무런 힘이 없어 온전히 주는 대로만 받을 수밖에 없었던 어린아이가 아니라, 부족한 부분을 요구하고 스스로 채워낼 수 있는 힘을 가진 어른이 됐으니까요.
정서적으로 메마른 나의 배경을 이해하고 충분히 물을 줌으로써 보다 촉촉한 환경으로 거듭날 수도 있습니다. 그건 이제 내 몫입니다.
그래도 마음이 가라앉는 건 사실입니다. 사랑받고 자란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달라. 티가 난다는 말, 빛이 난다는 말, 기가 살아있다는 말이 여전히 나를 자극합니다. 나는 사랑받고 자란 티가 나지 않는 건 분명하니깐요. 이 또한 내가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이미지 중에 하나인데 그렇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나는 남들이 보기에 사랑 많이 받고 자란 공주님 같았으면 좋겠거든요. 말 그대로 좋은 것은 다 가지고 부족한 면이 없는 모습으로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이건 내 문제 아니라 어쩔 수 없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겠지요. 그래야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으니깐요.
부모님들도 할 말이 많을 거란 걸 알고 있습니다. 부모님은 분명 자신의 방식으로 사랑을 주었을 것이 분명하니까요. 하지만 부모의 사랑을 자녀가 어떻게 주관적으로 받아들이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저 또한 제 방식으로 해석하고 이해하는 것을 더 사실처럼 여기고 있으니까요.
사람마다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방식이 다르다.
지난 추석날 저녁 밥상에서 입니다.
엄마가 조기를 하나 더 먹으라며 제 접시 위에 한 마리를 놓아주었습니다.
지난날 제가 퇴근하고 들어가면, 배고플까 봐 전이라도 하나 부쳐 놓거나, 밖에 있다가도 저녁 준비를 하러 집에 들어오곤 했던 엄마가 떠올랐습니다.
저는 대체 ‘사랑받는다’라는 거에 대해서 어떤 정의를 가지고 있었던 걸까요?
따뜻하고 다정다감한 말, 바로 내 마음을 공감해주는 ‘말’을 사랑의 증표로 여기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비언어적 메시지에서 보이는 것들이 있는데 저는 그동안 제가 놓치고 있던 수많은 비언어적 메시지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전에도 지금도 제 부모님은 똑같이 행동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 메시지를 읽지 못했던 지난날의 저와 지금의 저는 많이 달라져 있단 거겠지요.
용돈을 드리고 온날 아빠가 톡으로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용돈 잘 쓸게, 고마워’ 저는 생색내는 걸 참 못해서, 동생 편에 봉투를 전하고 온 참이었습니다. 적은 돈을 드리면서도 맛있는 거 드시라고 생색낼 수도 있는데, 저는 왜 그래야 했는지... 저 또한 참 표현을 잘 못하는 사람으로 자라 버렸습니다. 하지만 저는 알고 있으니 바꾸려고 꾸준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지난날 저는 어린 시절 받지 못했던 결핍된 사랑의 신호에 매몰되어 있었다면, 지금의 저는 사람마다 사랑을 표현하는 언어가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 언어가 내가 원하는 언어가 아닐 뿐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란 걸 왜 이제야 알게 되었을까요.
부모님을 참 많이 미워하고 나서야, 보이는 것 같습니다.
아빠는 물질적으로 많이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물질적인 풍요를 자녀들에게 충족시켜주는 것을 사랑이라 아셨을 겁니다. 아빠의 사랑의 언어는 그렇게 표현되었습니다. 엄마도 살가운 말과 포옹은 없었지만, 곁에서 나를 챙겨주고 있었습니다. 다만 제가 그 신호를 읽지 못했지요.
우리는 관계의 역사를 바꿀 수 있다.
부모들도 각자 관계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의 부모로부터 지지와 다독임을 충분히 받았다면 아마도 자녀에게 그것을 고스란히 전해주기기 한결 수월했을 테지요. 부모와 좋은 관계를 맺은 사람들은 자녀와도 친밀하고 따듯한 관계를 맺기 쉽고, 자신의 부모와 불안정 애착관계를 맺은 사람들은 자녀와의 관계에서도 세심하지 못하고 부적절한 반응으로 불안정 애착관계를 맺게 된다는 것은 이미 수많은 연구결과를 통해서 확인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다른 연구결과도 있습니다. 심리학자 루이스 코졸리노는 말합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인식하고 안전한 관계를 경험하면 다른 사람들과 안정적인 애착관계를 성공적으로 구축할 수 있다고요.> 즉 자신의 결핍을 알아차리고 안전한 관계에서 애착관계를 연습하는 것으로 우리는 관계의 역사를, 관계 속 반응 패턴을 바꿀 수 있다는 말입니다. 새로운 역사를 다시 쓸 수 있는 기회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부모님의 사랑의 언어를 확인하고 나니(어쩌면 이미 알고 있던 건데, 저는 왜 이제 막 아는 것처럼 느껴질까요? 몰랐던 것이 아닌데, 왜 이제야 이것이 눈앞에 생생하게 보이는 걸까요?)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내가 원하는 방향의 역사를 나와 남편, 아이의 관계에서 만들어 갈 수 있겠다는 자신감과 믿음 또한 생깁니다.
CHECK POINT
여러분의 사랑의 언어와 부모님의 사랑의 언어는 무엇인가요?
저는 지지와 다독임 즉 공감 어린 말이 중요했지만 제 아버지는 물질적인 선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었고, 어머니는 손수 지은 삼시 세 끼를 챙겨주는 것, 비올 때는 학교 앞으로 우산을 들고 마중 나와 내 가방을 받아주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서로 같다면 제일 좋겠지만, 사람마다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 다 다르다는 걸 기억한다면, 내 안의 아쉬움과 억울함은 줄어들고 한결 편안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내가 원하는 관계의 역사를 만드는 토대가 되어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