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화, 사슴 울음과 배꽃

청계천 로망스

by 초부정수

"사슴은 먹을 것을 발견하면 울음을 울어 동료들을 부르고 같이 먹이를 나누어 먹는 습성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


"필립이가 좀 취했나? 갑자기 사슴 이야기는 왜 꺼내는 거야?"


"데이비드가 옛 조선에는 어떤 숙박시설이 있었는지 궁금하다고 하니 그 시대의 이야기를 좀 해볼까 싶어서..."


이안과 데이비드는 사슴과 조선의 숙박시설 간에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필립이 취해서 한 소리는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呦呦鹿鳴 食野之苹 (유유녹명 식야지평)

我有嘉貧 鼓瑟吹笙 (아유가빈 고슬취생)

吹笙鼓簧 承筺是將 (취생고황 승광시장)

人之好我 示我周行 (인지호아 시아주행)


우우 우는 사슴의 울음소리 들판의 쑥을 뜯어먹네

나에게 반가운 손님이 오니 거문고 타고 생황을 부네

생황 불고 피리 불며 바구니를 받들어 올리네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갈 길을 인도해 주네


필립의 말에 의하면, 이것은 시경(詩經)에 들어있는 <녹명(鹿鳴)>, 즉 사슴 울음소리라는 시의 일부분으로, 일본 사람들은 이 시의 제목을 ‘로쿠메이’라고 읽는다고 한다.


"오래전 일본에 로쿠메이칸이라는 호텔이자 동시에 사교장이 있었지. 1883년에 설립된 이 ‘로쿠메이칸(鹿鳴館)’은 당시 일본의 외무부 장관이었던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가 기획하여 일본제국 정부에서 운영하던 호텔이자 국제 사교 클럽이었어."


로쿠메이칸.


"그러니까 19세기말 일본에는 로쿠메이칸이라는 신식 호텔이 있었단 말이군."


"그렇지,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라 호텔 이름이 로쿠메이칸이라는 것이야. 왜 굳이 호텔 이름을 사슴울음이라고 했느냐는 거지."


"왜 그랬는데?"


"일본 문화에 대한 고전으로 알려진 <국화와 칼>에서는 일본인의 특징의 하나로 수치 문화(羞恥文化)를 들기도 하는데, 수치스러운 일을 남에게 들키면 할복도 하지만 들키지만 않으면 괜찮다는 식이지. 사회적인 평판이나 국제적인 평판이 일본인들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일인 모양이지. 그건 일부 우리도 그런 것 같다고 해야할 것 같은데 일본은 좀 심한 편인가봐. 하여간, 일본이 개국을 하고 서구 제국들과 조약을 체결해 나가는 과정에서 요구한 외국인에 대한 치외법권(治外法權) 조항은 일본이 아시아의 문명국이라는 자부심을 뭉개버린 수치라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해."


"치외법권 조항이라는 것이 불평등하기 때문인가?"


"따지고 보면 그런데, 서양인들은 일본이 아직도 참수와 같은 형벌을 스스럼없이 하는 것을 보고 미개한 나라라고 생각하여 치외법권 조항을 강제한 모양이더라구. 이건 당시의 조선도 마찬가지였어."


"일본의 입장에서는 수치스럽다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겠군. 그래도 그 로쿠메이칸과는 별로 관련성이 없어 보이는데..."


"이노우에는 일본이 유럽과 같은 선진 문명국이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이런 불평등 조약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강박에 사로잡혀서 로쿠메이칸(鹿鳴館)을 설립하게 되었는데, 사슴이 먹이를 나눠먹듯 일본과 유럽이 서로 공생(共生)을 하자는 의미를 담은 것이라고 해."


로쿠메이칸의 사교댄스를 그린 그림..


"그래서 호텔에서 사교춤을 추고 그런 거야? 조금 이상하긴 하다."


"이노우에는 독일인 수의사, 요하네스 루드윅 얀손 Johanes Ludwig Janson을 초빙하여 춤도 가르쳤는데, 유럽식 사교 클럽에서 유럽의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일본인들을 전시(展示)해서 일본이 유럽과 같은 수준에 도달한 문명국임을 강조하고 그러한 문명국 간의 조약은 평등해야 한다는 점을 표시하려고 했다는 것이야. 당시 이미 근대화를 이루고 문명국이 되었다고 주장하던 일본 도쿄(東京)의 모습 중의 하나인데 조금 어색하지?"


"그렇기는 한데, 그래도 일본에는 꽤 괜찮은 숙박시설들이 많이 있었을 것 같기는 하네."


"그래. 당시의 조선에는 변변한 숙박 시설이라는 것이 없었고 있어도 식당이나 숙박시설 모두 위생은 엉망이었다고 하지. 잠은 집에서 자고 밥도 집에서 먹는 것이 일반적인 생활이었으니 그런 분야의 산업이 성장하기는 어려운 환경이었던 것도 원인 중의 하나일 수 있다고 봐."


"그럼 당시에는 변변한 숙박시설이 없었겠네. 친구나 친척 집을 찾아가야 했겠어."


"그랬지. 그런데 일본이 몰려 들어오고 외국인들도 조선 땅에 더 많이 발길을 하게 되면서 일본은 조선에도 신식 호텔을 만들어야만 했어. 그래서 처음 만든 것이 대한제국 황제가 만든 환구단을 허물고 그 자리에 세운 조선호텔이야."


"조선호텔이 원래 일본인이 만든 것이었구나. 이름이 조선호텔이라 몰랐네."


"1913년에 일본 총독부의 철도국에서 경영을 하던 호텔이었지."


"그렇다면 조선호텔이 조선 최초의 신식 호텔이었던 거야?"


"그렇지는 않아. 조선호텔이 현존하는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호텔이기는 하지만, 그 이전에 경성에는 신식호텔이 운영되고 있었어. 혹시 드라마 미스터션샤인을 봤으면 드라마에 나오는 글로리 빈관이 기억날 거야. 그렇지?"


"글로리 빈관 알지. 그게 원래 먼저 있던 호텔이구나."


"드라마는 역사가 아니니까 그건 아니지만, 내 생각에 글로리 빈관이 모델로 했을 거로 짐작되는 호텔이 있지. 1902년에 지금의 정동 이화여고 뒤쪽에 개업한 호텔로, 손탁빈관(Sontag賓館)이나 한성빈관(漢城賓館)이라고도 했고 그 외의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던 곳이 있었어."



"손탁이라는 명칭은 어떻게 만들게 된 거야?"


"사람 이름이야. 우리가 명월관 이야기를 했잖아? 손탁호텔은 명월관 이전에 세워졌는데, 1885년 주한 러시아 공사에 임명되어 파견된 베베르(Карл Иванович Вебер, 1841~1910)의 처형인 앙투아네트 손탁 Antoinette Sontag, 1854~1922이 운영을 했어. 손탁의 국적은 독일이었지"


"그런데 독일 사람이 조선에 와서 호텔을 운영하게 된 이유가 따로 있었나?"


"순수한 사업적 목적으로 한 것은 아닌 것 같아. 손탁 여사(Miss Sontag)는 청과 일본이 조선을 사이에 두고 패권을 다투는 틈을 타, 러시아를 끌어들여 조선의 친러 정책을 이끌어내고 조선의 독립운동을 지원했다고 알려져 있거든. 명성황후 시해 이후 고종의 러시아 공관 피신(俄館播遷)에도 역할을 한 것 같아. 그래서 고종이 현재 이화여자고등학교 자리에 있던 한옥 한 채를 양옥으로 개조해서 하사했고, 그 집은 배일 정치단체인 정동구락부貞洞俱樂部의 비밀 회동 장소로도 사용되기도 했지.

손탁 호텔. 1902년


"그렇다면 손탁호텔과 일본의 로쿠메이칸이 비슷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건가? 시작은 서로 조금 다른 것 같아 보이는데 말이지."


"유사한 점이라면 손탁호텔 역시 외국 손님들과 조선인들의 사교의 장 역할을 했다는 사실, 그리고 비록 손탁 Sontag 개인의 사업이었으나 고종이 배후에서 자금 지원을 한 실질적인 대한제국 정부의 영빈관이었다는 점에서는 도쿄(東京)의 로쿠메이칸(鹿鳴館)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겠지. 다만, 일본의 로쿠메이칸이 서구와 동등한 문명을 가진 나라라는 것을 호소하기 위해 기획된 것과는 다르다고 해야겠지."


"그것도 그렇지만, 일본 정부가 사슴이 우는 것에 비유하여 일본도 유럽 국가들 못지않다는 것을 호소한 일본과 달리 조선 정부는 대놓고 유럽의 민간인이 조선에서 유럽 문화를 기반으로 사업을 함에 있어서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보여준 것이 더 큰 차이가 아닌가 싶어."


"데이비드의 생각이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여성에 대한 교육에 부정적인 시각이 만연하던 시대적 특성에도 불구하고, 황실의 상징인 배꽃(李花)을 학교 이름으로 하사한 고종이 왕실의 내탕금을 지원한 빈관의 이름에는 손탁 Sontag 여사 이름을 그대로 두었다는 것 또한 특별해 보여. 그리고, 그 이후에 창업한 명월관은 외국인들도 찾던 완전한 개인 영리 기업이었지만 로쿠메이칸과 달리 유럽의 사교댄스가 아닌 조선 기생의 가무 공연을 했다고 했잖아? 이런 것을 보면 개방과 개화, 그에 따른 다양성과 소통, 그리고 서로 간의 존중의 문화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결과가 아닌가 싶은데, 요즈음 용어인 세계화라는 화두를 놓고 판단할 때 조선의 근대 문화 수준이 일본제국 정부보다 더 성숙한 것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고.."


"꿈보다 해몽이라는데, 그럴듯한 해석이긴 하다."


"나는 이야기를 듣고 나니 그런 호텔에서 한 번 묶어보았으면 좋겠다. 사라진 것이 좀 아쉽긴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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