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리몰리 인도델리
<Prepone>은 인도 영어(Indian English)에서 널리 사용되는 정식 단어이지만, 미국이나 영국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거나 비표준으로 여겨지는 단어로, 그 뜻은 영어의 Postpone, 즉 '뒤로 미루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의 반대인 '앞당기다'라는 의미이다.
인도의 태양은 자비가 없다. 인도 여행을 하는 사람들은 Merciless Indian Sun이니 Scortching Sun in India라는 말을 한 번쯤은 들을 수 있다. 인도의 여름은 뜨거워서 마치 최대로 출력을 올린 전기담요를 맨 살에 감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두바이와 같이 축축한 공기에 섭씨 50도까지 수은주가 오르는 경우는 드물지만 40도 이상은 거뜬하다. 요즘 한국 날씨도 만만치 않은데, 더운 느낌은 많이 다르다. 한국은 덥다. 습해서 꿉꿉하다. 인도의 델리는 뜨겁고 뽀송하다. 물론 몬순 시즌 중에는 높은 기온에 습기다 더해서 핀란드 사우나와 같아 안경을 쓰고 다니기 어렵다.
그래도 우리에게는 에어컨이라는 대단한 문명이 있다. 물론 비용이 좀 많이 들기는 하지만 더워서 죽을 수는 없다. 흔히 '더워 죽겠네' 또는 '추워 죽겠네'라는 말을 하지만, 실제로 한국에서는 더워서 죽거나 추워서 죽는 일이 드물다. 반면에 인도에서는 정말 더워서 죽고, 추워서 죽는다. 그것도 매년 꽤 많은 수의 사람들이 그렇게 목숨을 잃는다. 어찌 생각하면 이 또한 Poverty Penalty, 즉 빈곤하기 때문에 받는 형벌과 같은 것이다.
사실 인도의 가난한 사람들은 일상적인 서비스를 받기 위해 더 많은 돈이 필요하다. 전기와 물은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이지만, 전기와 물이 들어오지 않는 슬럼이나 길거리에서 사는 수 억 명의 빈곤 계층 사람들은 그나마 최소한의 전기와 물을 얻기 위해 뇌물을 주어야 하는 처지에 내몰리곤 한다. 결국 부자들보다 단위당 비용은 더 높은 셈이 되는 것이다.
빈곤계층이 들으면 복에 겨운 푸념이라고 할 이야기이지만, 얼마간의 돈이 있어서 에어컨과 차가운 물을 얻을 수 있는 사람들은 다른 이유로 고통을 받는다. 예를 들면...
집에 에어컨이 고장 나서 새로 구매를 해야 하는 경우..
온라인 몰이나 홈쇼핑에서 다양한 제품과 부가 서비스 등에 대해 알아본 후,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손가락 몇 번 클릭하면 꽤 빠른 시간 내에 물건과 설치 기사가 방문하여 설치를 해주고 고장 난 기계와 쓰레기도 함께 치워주니 우리는 리모컨 하나만 조작하면 시원한 여름을 가질 수 있다. 당연한 것처럼 보이는 이런 일들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배후에서 이루어지는 수많은 일들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모른다. 하지만, 인도에서 조금이라도 살다 보면 그 일들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되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온라인 쇼핑몰은 아무래도 불안하다. 직접 발로 뛰어 제품을 고르는 것이 안전하다.
인도 최대 기업집단인 Tata 그룹에서 운영하는 Croma 또는 Reliance Industries 그룹의 Reliance Digital이라고 하는 가전제품 전문점을 찾는다. 물론 croma와 Reliance Digital의 온라인 쇼핑도 가능하다. 하지만, 그래도 직접 물건을 봐야 하겠다. 우리도 오래전에 그랬다. 연탄도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보고 사는 사람들이었던 적이 있다. 어쩌면 그 덕에 손 감각이 발달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가전제품 전문점을 찾는 이유는 두 가지인데, 첫째는 우선 물건을 직접 들여다볼 수 있다. 완전히 제품의 기능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일단 실제로 존재하는 무엇을 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둘째는 전문점에 근무하는 직원으로부터 제품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고, 질문도 할 수 있다는 것이 더 큰 장점이다. 문제는 이 두 번째 장점부터 시작이 된다. 직원들이 그리 비싼 가전제품을 사용해 본 적이 없어서 한국인이 묻는 질문에는 거이 답을 하지 못한다. 이런 경우는 특히 애플 매장에서 심하게 느껴진다. 직원들이 애플 제품을 사용해 본 적이 거의 없다. 그들은 노트북 컴퓨터를 사용해 본 적도 없고, 샤오미 핸드폰을 쓴다. 그들이 아는 애플은 과일가게에만 있다.
그렇다면, 삼성이나 LG 직영 판매점이 더 나은 선택 같아 보인다. 한국의 최고 기업들이 운영하는 곳이니 문제가 없을 것이다.
GK2 마켓에 삼성전자의 직영 판매점이 있다. 방마다 한 대씩 실외기 없는 창문형 에어컨 5대가 필요하다. 집주인 할머니가 에어컨을 교체해 줄 것 같지 않다. 더워 죽느니 우선 새것으로 교체하는 것이 덜 위험하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게 삼성전자 직영 판매점은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다. 대리점 사장도 나름 동네에서 유지인가 싶다. 행동 하나하나가 다 자신감이 넘치고 여유로우며, 다짜고짜 삼성의 누구를 아는지 묻는다. 물론 알지만, 안다고 할 필요는 없다.
"창문형 에어컨 5대가 필요한데, 내일까지 배달 가능한가요?"
"잠시만요.. 확인 좀 해보겠습니다..."...
"네, 가능하네요. 이 사이즈면 충분히 방마다 시원할 것이고, 리모컨으로 다 조정할 수 있고. 제습도 되고, 시간 예약도 되고요..."
"OK, 잘 알았습니다. 그것보다 분명히 내일까지 배달이 돼야 하고, 설치도 돼야 하는데 가능한 것이죠?"
"당연히 설치 기사도 같이 갑니다. 금방 할 수 있습니다. 노 쁘라블럼."
노 쁘라블럼이라는 말에 약간 기분이 싸해지지만, 삼성전자 아닌가.. OK
"신용카드로 계산되죠?"
"물론입니다. 영수증도 드려요."
계산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당부를 한다.
"내일 배달 올 때 전화를 좀 해주시고요, 지금 걸려있는 에어컨이 일제인데 오래된 것이어서 사이즈가 오늘 구매한 삼성 제품보다 좀 큰 것 같아요. 그러니까, 창문에 달면 공간이 남게 되니, 그 공간을 막을 수 있도록 잘 맞는 자재를 가져와서 마무리해 주어야 합니다."
"당연하죠. 늘 하는 일이라서 잘 압니다. 노 쁘라블럼 써어~"
왜 찝찝할까....
다음 날 저녁 8시다. 아직도 에어컨이 오지 않는다. 전화도 없다...
할 수 없이 사장 놈에게 전화를 할 수밖에...
"오늘 에어컨 배달하고 설치해 준다고 하셨는데, 아직 물건이 안 왔는데 어떻게 된 거예요?"
"그럴 리가 없는데요. 서너 시쯤에 물건이 창고에서 나갔다고 들었는데, 아직도 안 갔다고요?"
"내가 전화해 달라고 했는데... 하여간 알았고, 그럼 지금 그 물건이 어디에 있다는 겁니까?"
"확인하고 전화드리겠습니다..."
삼십 분이 지나 할 수 없이 다시 사장 놈에게 전화를 했다.
"이게 지금 도대체 뭡니까? 벌써 밤 9시예요. 오늘 중으로 배달이 되는 거요?"
"지금 가고 있다고 합니다. 길이 막혀서 좀 늦고 있다니 곧 도착할 거예요. 조금만 더 기다리시면 됩니다."
밤 10시.
집 앞에 트럭이 한 대 도착했다.
서너 명이 짐을 내리는데, 삼성 에어컨이다. 드디어 오긴 왔으니. 일단 화는 참고 설치부터 해야 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두 대만 가져왔다. 분명히 다섯 대를 주문했는데..
"왜 두 대만 가져왔어요?"
"우리는 모릅니다. 두 대 주던데요..."
이건 또 뭔 소린지...
다시 사장 놈에게 전화를 해야 한다. 10시가 넘었어도 할 수 없다.
"두 대만 왔는데, 세 대는 어디에 있는 거요?"
'참, 아까 통화할 때 말하려고 했는데 그만 급한 마음에 말씀을 못 드렸습니다. 세 대는 지금 자전거에 실어서 가고 있다는데, 운반하는 자전거 기사(?)가 핸드폰이 없어서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모르지만, 가고는 있어요.."
그사이에 트럭으로 배달을 온 사람들이 설치를 하기 위해 전에 있던 에어컨을 뜯어냈다. 그러자 뻥 뚫린 창문을 통해 온갖 날벌레들이 불빛에 이끌려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할 수 없다. 최대한 빨리 작업을 끝내는 것이 먼저다.
에어컨 한 대를 뜯어낸 설치 기사는 만족했는지, 방 안에서 담배에 불을 붙이고 연기를 빨아 제낀다. 이건 또 무슨 시추에이션인지...
"여기서 담배 피우면 안돼요. 나가서 피우던지.. 그것보다 빨리 설치를 해야지 날 샐 겁니까?"
그제야 담배를 끄고 다시 설치를 시작한다. 그들이 설치를 하는 동안 나는 사장 놈과 계속 통화를 하며 자전거의 위치 파악을 하는 중이다.
"설치 다 했습니다."
아... 골 때린다.
"내가 어제 분명히 사장에게 창문 틈을 막을 수 있는 제대로 된 마감재를 가져와서 틈이 없게 해 달라고 했는데. 그 마감재 어디에 있어요?"
"그건 모르겠는데요. 마감재라는 게 있다고 해요?"
"좀 눈으로 보고 이야기합시다. 이렇게 큰 틈이 있으면 에어컨이 뭔 소용입니까?"
"에어컨이 있으면 시원하잖아요?"
아... 이 인간도 집에 에어컨이 없나 보다... 돌겠다.
"하여간, 무조건 저 벌어진 틈을 없애주세요."
"노 쁘라블럼.."
그리고 에어컨이 들어있던 포장 박스를 가져와 칼로 자르기 시작한다. 대략 5센티미터 정도의 두께가 될 때까지 자른 박스의 자투리를 합쳐 틈을 매우기 시작한다. 황당하다...
"그게 뭐요? 그걸로 뭘 막겠다는 겁니까? 당장 어디 가서 각목이라도 사서 제대로 재단을 해서 막아줘야 할 것 아니오?"
"노 쁘라블럼..."
한 시간 후에 어디서 각목을 구해온 설치 기사가 뚝딱거리며 겨우 틈을 막았다. 최소한 벌레는 안 들어올 것 같아 보이는데. 벌써 시간이 새벽 1시다. 아직도 나머지 세대를 실은 자전거의 위치는 오리무중이다.
결국 이틀이 더 걸려 나머지 세대의 설치가 마무리되었다. 무엇이건 결국 되기는 된다. 물론 조금 마무리가 거칠고, 과정 중에 성질이 나기는 하지만 삼성 에어컨은 그래도 기능을 하기 시작했다. 삼성전자에 컴플레인을 할까? 해봐야 뭐 삼성이라고 해도 답이 없을 것이 뻔하다...
첫째, 도로사정과 교통 체증을 삼성전자가 해결할 수 없다.
둘째, 대부분의 온라인 쇼핑몰이나 대형 가전 브랜드조차도 최종 배송은 지역 파트너(소형 딜러나 설치 기사)에게 위탁해야 하는 것 같다. 이 또한 쿠팡과 같은 총알 배송 인프라가 없어 삼성전자가 어떻게 할 수 없다. 자전거 기사에게 핸드폰을 주고 위치 파악을 할 수도 없다. 만약 핸드폰을 주면 그것 가지고 그대로 사라질 가능성이 거의 100%이다.
셋째, 설치 기사와 함께 배송되기 때문에, 인력 스케줄과 연동되어 지연이 발생하기 쉽고 설치 기사 또한 삼성전자 직원이 아니다. 이 부분은 삼성전자가 해결해야 할 문제이지만, 그렇게 까지 할 것 같지 않다. 조금 실망스러운 일이다.
넷째, 내가 먼저 전화해서 물어봐야 한다. 마구 늘어져도 상관없는 인도식 시간 개념 (IST_ Indian Stretchable Time)과 통지 부족은 문화적인 특성으로 일개의 외국 회사인 삼성전자가 바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다섯째, 인도인들은 최신 기능이 탑재된 가전제품이나 핸드폰을 구매하고 약속된 기능이 제공되지 않아도 컴플레인을 잘 하지 않는다. 자신이 잘 몰라서 못 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환경에 익숙해진 기업들은 컴플레인에 민감하지 않다. 결국 내 입만 아프다.
우리에게 일상적인 것들이 누군가에게는 기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