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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밀 Jul 30. 2022

기분을 보존하는 저장소

일기라는 위로


 문구류 쇼핑에 진심이다. 그래서 가끔 첫째 아이와 동네 문구점에 가면, 우리는 고요히 흩어진다. 먼발치에서 서로의 생사만 확인되면 동선은 관여하지 않는다. 각자의 취저 아이템에 골몰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너의 '포켓몬 카드' 만큼이나 엄마에게도 열혈템은 있는 법. 그건 다름 아닌 각종 필기류와 다이어리다.

 연말이 가까워지면 일 년 내 묵힌 조바심이 빼꼼 고개를 든다. 바야흐로 내년도 다이어리가 쏟아지는 시즌이기 때문이다. 가는 곳마다 매혹적인 다이어리와 필기류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나를 둘러싼 것들 중에 다이어리만큼 일 년 사계절 내내 자주 꺼내어보는 물건이 또 있을까. 옷은 대부분 한 철 입으면 다시 서랍 안으로 돌아가기 마련이니 눈에 익을만하면 멀어진다. 올여름 수시로 꺼내 입은 자수 원피스도 한 달 후면 당분간 볼 일이 없듯 절기에 따라 취향도 접혔다 펴진다.


 다이어리야말로 실물로 보고 사는 게 실패 없는 가장 확실한 구매 방법이지만 디자인 면에서 끌리는 제품은 대부분 온라인에서 발견되곤 한다. 즉시 구매했거나, 장바구니에만 담겼다 자취를 감추거나, 사진발에 속아 구매한 어딘가 3프로 모자랐던 지난 다이어리를 한데 모아보니 수년간 취향만은 고인 물이었구나 싶다.

최근 9년간 다이어리 모음

  

 개미지옥은 다름 아닌 인간계에서 강력한 진가를 발휘한다는 걸 과연 개미들은 알까. 양지바른 모래 땅에 깔때기 모양으로 깊이 파인 구멍은 호시탐탐 인간계 곳곳을 도사리고 있다. 몇 번의 클릭만으로 개미귀신은 원하는 개미를 손에 넣을 수 있다.

 내가 '원하는 개미'의 조건은 꽤나 확고했다. 다이어리 구매에 있어 필수 불가결한 몇 가지 요소가 늘 따랐다.


1. 소프트한 커버일 것

2. 펼쳤을 때 쓰기 편할 것

3. 두껍지 않아 휴대하기 좋을 것

4. 위클리보다는 먼슬리일 것

5. 13월을 포함할 것


 일기의 물성이 위의 원리원칙에 부합할 만큼 빈틈없다 보니 왠지 내지에 담기는 마음들은 무척이나 정교해야 할 것 같지만, 현실은 절기 사이의 간극만큼이나 빈틈 투성이다.


 일기란 언제부터 내 삶에 이렇게 관여하기 시작했을까. 초등학교 시절, 학교 앞 문구점에서 나의 원픽은 단연 금색 자물쇠가 걸린 다이어리였다. 꿈도 많고 비밀은 더 많던 질풍노도기의 소녀는 자물쇠의 물성에 그만 매료되었다.

 잠그기만 하면 영원히 보장될 것 같은 비밀이 헐렁하게 덜컹 열리는 건 모르고 싶던 시절이다. 은폐성만큼이나 중요한 건 표지 디자인이었다. 표지에서 나름의 심미적 요소를 만족해야 후보군에 오를 수 있었다. 그때도 확고한 몇 가지 기준이 존재했는데 일단 만화 캐릭터가 그려진 표지는 여지없이 광탈이었다.

 적어도 비밀 일기를 쓰는 감성인이라면, 표지 디자인은 심플한 정물화가 그려져 있고 그 아래에는 볼드체로 무심히 쓰여진, 뜻 모를 영문 필기체 두 줄 정도는 휘갈겨있어야 마음이 동했다. 예나 지금이나 타협 불가능한 미의 기준에 헛웃음이 나오는구나.



 

 싱어송라이터이자 작가 안복진은 <노래가 되지 못한 것들>에서 "일기라도 써야 겨우 눈 붙이고 잘 수 있는 속상한 날들이 많다"고 했다. 내게도 일기란 그와 유사한 감정의 매개다. 초등학교 때 옆자리에 앉은 친구가 이유 없이 흘겨보던 눈빛이 그냥 억울해서, 내겐 기쁜 일이 보편적 기쁨이 되지 않는 데에서 오는 씁쓸함이 커져서, 공감대의 모양과 크기가 각기 다를 때 오는 갈증이 깊어져서 나는 주로 일기로 나를 달랬다.


 위로받지 못해 우중충한 못난 마음을 꾹꾹 담아 나열해보며 가벼워지고 싶던 그때의 나는, 어느 것 하나 치환되지 않은 채 지금껏 보존되었다. 자물쇠 걸린 다이어리가 성행하던 시절은 이미 추억 저편으로 사라졌지만, 진짜의 마음을 눌러 담고 싶은 기분만은 여전히 유효하다.


 찬바람이 불고 연말이 다가오면, 새해를 기다리며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에 매년 나의 설렘을 보태본다. 올 해도 어김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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