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도피
그렇다. 정확히 말하면 도피였다.
육아는 매일 해도 어쩐지 자신이 없고, 눈뜨면 덧없이 새 날이 밝았다. 전날 밤, 깊은 심호흡과 구간 반복을 통해 나름 공들여 다져놓은 습관도 걸핏하면 리셋되기 일쑤였으니, 아침이면 '오늘의 상태 메시지'를 새로이 체크하고 아이들에게 결국 하기 싫은 말들을 꺼내보여야 했다.
그럴때마다 도망치듯 책으로 도피했다. 규격화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일상 따위는 잠시 잊으려 본능적으로 파고 들었다. 책은 내게 무한한 장점들로만 점철된 자기 우물의 표상 같았다.
내가 파놓은 우물을 매일 들여다보는 일. 큰 노력없이도 쉽게 피신 가능했다. 체크할 일이라곤 읽다 만 페이지가 아직 잘 접혀있는지 책 모서리에 눈길 한번 주는 정도면 충분했으니까. 언제고 다시 펼쳐도 이음새가 서서히 살아났다.
어디 그뿐인가. 한번 빠지면 스마트폰보다 중독적이라 몰입하는 내내 피로한 현실을 등질 수 있고, 헤어 나오는 데에 버퍼링도 없어 빈번히 경계를 넘나들기 쉽다. e-book이 아닌 이상 충전의 번거로움 또한 없다. (난 종이책 추종자다)
이런 나지만 오늘은 잊은 게 있다. 병원 검진을 위해 서둘러 집을 나서느라 한 권의 여유를 꾸리는 일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 이동하며 대기하며 거듭 잉여시간이 생겼다. 어제 가까스로 빌려둔 책의 표지와 활자가 가뜩이나 갈증나는 머릿속을 자꾸만 맴돈다. 미지의 세계에 발 담그기 직전 이 막연한 호기심과 기대는 여행을 준비할 때와도 많이 닮아 있다.
간만의 외부 일정으로 설렘도 잠시, 습관처럼 다시 책으로 마음이 기운다. 아이 하원까지는 두시간 남짓. 어서 길어온 새 우물을 파러 가야겠다. 늘 책이 해결책이다. 서둘러 귀가해야 할 이유를 찾는다.
사진: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