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히려 최첨단 가족'이 내게 준 것
엄마가 돼서 가장 좋은 것은 바로, 좋은 삶의 방법은 정해져 있지 않으니 나 자신으로 살아가는 길밖에 없음을 깨달은 점이다
비단 엄마에게만 적용되진 않으나 사회가 기대하는 엄마의 정체성을 가뿐히 내던질 수 있는 명쾌한 한 줄이 아닐까.
엄마이기 전에 고유한 나 자신이 있는데 아이를 키우며 나의 실존은 날로 투명해지는 현실은 자주 서글펐으니 말이다.
우리 집은, 이 사회가 암묵적으로 합의한 규격화된 4인 가족의 외형을 띠고 있다. 대체 정형화된 가족의 틀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왜 결국 그것을 묵묵히 따를 수밖에 없는가. 가족 구성원이기 전에 내 온전한 특질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머리로는 늘 강조해도 어쩔 수 없이,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가정의 오랜 평화를 위한답시고 내 한입 닫던 날이 부지기수다.
'나만 참으면 잘 넘어가겠지'
'내일이면 또 별일 아닌 듯 잊힐 텐데 뭘'
당장 눈앞에 벌어진 일도 힘든 와중에, 나를 더 고단하게 하는 생각이 야속하리만큼 꼬리를 문다.
'지금도 버거운데 나중에 사춘기 오면 그땐 대체 어떻게 감당해야 되지..'
머릿속에 그려지는 미래를 성급히 점치며 무의식적으로 나는 아이를 다그치고 있었다. 이는 결국 내가 가진 불안을 아이에게 전가하는 것 밖에 되지 않았다. <오히려 최첨단 가족>의 박혜윤 작가는 "실수를 하면서 삶이 얼마나 구질구질한지 직접 느끼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한다. 그리고 나와 같은 불안을 가진 부모에게 다독이듯 말해준다.
나는 아이와 함께 하는 경험을 통해 나 자신으로 살아가는 것뿐이다
그냥 나로 살아가면 그만인데 어찌 보면 버거운 선택을 거듭해온 것 같다. 경력단절 기간은 그 사이 계속 늘어만 가고, 이제는 전처럼 일을 하고 싶다는 의지마저 어쩐지 투철하지 않다. 상황과 현실의 모양에 맞게 하루씩 깎이고 부수며 새로이 다듬어진다.
이 책을 접한 후로 나의 육아는 실로 너그러워지기도 했다. 지금처럼 아이가 어릴 때도, 커서도 해결해야 할 문제가 없는 날은 결코 오지 않으니 매일 고뇌하며 살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그래서 집안 일과 양육에 있어서만은 그냥 주어진 하루에 충실하며 살기로 했다. 딱 하루만큼의 즐거움과 불안, 걱정 정도만 하며 하루를 나는 것이다. 이럴 때는 숲을 잘 보지 못하고 나무에 치중하는 내가 아무래도 덜 피로해서 좋다. 달면 냅다 삼키는 나도 좋고.
주말 동안 나 없이 간 할머니 댁에서 아이들이 하룻밤을 지내고 왔다. 그 사이 미뤄둔 글을 쓰고, 느리게 밥을 차려먹고, 보고 싶던 친구를 만나고, 혼자 외식도 했다.
하룻밤의 공백을 두고 만난 아이들은 그 사이 왠지 달라 보였다. 실내복 차림으로 버젓이 눈앞에 나타난 꼬질꼬질한 행색에도 어딘지 모르게 옹골진 눈빛을 띠었다. 불과 하루 만에 우리 사이에 무형의 자립성 같은 것이 싹튼 느낌.
그리고 이 감정은 분명 나만의 착각은 아닌 듯 보였다. 나를 응시하는 아이의 시선도 슬쩍 바뀐 것이다. 떨어져 보니 엄마가 더 그리웠을 것이고 그래서인지 참았던 귀한 마음을 가만가만 전하기도 한다.
우리 사이에 어떤 거리가 생겼다. 물론 이 틈새가 얼마나 유지될지는 모른다. 그저 당분간 서로를 너무 시도 때도 없이 찾지도, 무리한 걸 요구하지도 않을 적정한 수준의 긴장과 안도감이 돈다.
어릴 때 걸스카우트에서 방학마다 야영을 갔다. 야생에서 살아남으려 버티고 버티다 집으로 돌아와 처음 만나는 엄마의 존재는 온 우주만큼 광활했다.
할머니 댁에서 돌아온 꾀죄죄한 아이들을 씻겨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히며 그 시절 야영에서 돌아와 마주한 엄마 얼굴이 떠올랐다. 집을 떠날 때와 변함없는 그 모습 그대로 날 반겨주던 환한 미소와 넉넉한 품을 기억한다.
"누군가 그렇게 긴 호흡으로 자기를 보고 있다는 것만으로 아이에게는 엄청난 자산이 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하루 단위의 생활 리듬을 갖되 긴 호흡을 유지할 요량으로 거듭 오늘을 산다.
사진: unsplash@lubo_min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