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주문의 발견

구겨진 앞면이 발견한 자신의 빛나는 뒷면

by 제이에스

야밤에 잠깐 뛰었는 데 이렇게 힘들다니 운동 좀 해야겠다. 아까 그 아가씨 놀랐으려나? 내가 갑자기 뛰어와 붙잡아서 놀란 눈치던데.... 그것 빼곤 내가 매너 없게 행동 한 건 없겠지? 요즘 세상이 험한데, 집엔 잘 들어갔나 모르겠다. 뒷모습은 영락없는 학생 같던 데.


잠깐 봤지만 계속 신경이 쓰였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낯이 익은 것도 같다. 철수, 준호 새끼들 때문에 정신없어 주변을 보지는 못했지만 포장마차에서 몇 번 본 것 같기도 하다. 나중에 포장마차에서 만나면 뭐 하나 시켜줘야겠다.


휴~ 서류도 찾았고, 이제 씻고 자야겠다. 이 서류.... 아니, 부적은 회사에서 파쇄해야지 나중에 문제 생길라. 응? 근데.... 이거 뭐야?


"울지 말 것.... 사랑해.... 힘을 내.... 계속해.... 널 믿어.... 너니까."


그 아가씨가 쓴 건가? 에휴~ 그 친구도 나만큼 힘든 가보구나. 그렇지, 세상에 나만 힘들까. 부자도 부자만의 고뇌가 있다지만, 나는 젊은 그 친구가 사무치게 부럽다. 내가 20대면 이 회사 말고, 하고 싶었던 노래나 카페에서 계속 일하면서 카페 해서 대박 났을 텐데. 이 지옥은 나 혼자 만으로도 충분하니 아무도 오지 않길. 나 희생하니깐 나중에 천국 가겠지? ㅎㅎㅎ


"힘을 내! 너니까!......."


뭐지? 이 글. 입에 붙네? 이 친구 작가 지망생인가? 고맙네. 힘낼 수 있는 주문을 알려줘서. 진짜 밥 한 번 사줘야겠다. 시계를 보니 자정이 넘었다. 내일 또 출근인데, 일단 자자.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부적 같은 서류의 빨간 표시를 다시 확인하며 수정한다. 폰트도 부장님이 좋아하는 폰트로 다시 확인하고, 눈에 잘 보이게 간격 조절도 다시 했다. 마지막으로 맞춤법 검사기에 돌려서 오타 확인. 오케이, 이제 됐어. 출력해서 부장님이 검토하실 때 불편하지 않을 곳에 스테플러를 찍는다. 그리고 다시 한번 넘겨보며 확인한다. 완벽하다. 적어도 내 기준에는... 이제 부장님 기준에만 맞기를 기도한다.




"아이고, 이놈의 화장실은 왜 이렇게 자주 가고 싶어지는 거야~ 일 못하게. 오늘 완전 업무 능률 백점인데."


"아, 선배님, 오셨습니까? 아까 부장님 계신 회의실에서 큰 소리 나던데 무슨 일 있나요?"


"말도 마. 김 과장 또 깨졌어."


"아.... 총체적 난국이네요. 결재받을 거 있는 데, 부장님 심기 안 좋을 테니 내일 받아야겠네요."


화장실이 조용해졌다. 다들 나갔나 보다. 다행히 오늘은 다리 저리기 전에 나올 수 있었다. '다행'이라는 말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어제 조용히 말씀하시던 부장님이 드디어 오늘은 터지셨다. 송구스럽다. 무능한 직원은 상사를 힘들게 하는구나. 이 서류.... 또다시 부적이 되어 버렸다. 이렇게 밖에 못하는 민폐스러운 내가 너무 싫다.


비참하게 깨지고 돌아온 화장실 칸 안에서 고작 다리가 저리지 않은 것에 안도하다니. 죽고 싶다는 생각과 살고 싶다는 본능이 눅눅한 공기 속에서 섞여 난 더 구겨졌다. 누가 날 좀 펴줬으면 좋겠다.


거울에 비추어진 내가 보인다. 저 한심한 인간을 보고 월급 루팡이라고 하는 거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ver26 기획서류를 작성해야 한다. 힘이 나지 않는 상황인 데 힘을 내야 한다. 거울 속 나에게 말해 주었다.


"사랑해. 힘을 내. 계속해. 널 믿어. 너니까."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난 뭐에 홀린 듯 일에 집중했고, 금방 ver26을 완성했다. 그리곤 칼퇴를 했다. 이렇게 크게 깨지는 날엔 일도 못하고 방황하다가 지옥 같은 시간을 견디면서 퇴근했는데 신기한 경험이었다. 말도 안 되게 들릴 테지만 화장실에서 읊조렸던 그 글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 글.... 진짜 사람을 살리는 힘이 있나 보다.




너무 힘들고 고된 날을 보낸 나에게 포장마차의 휴식을 줘야겠다. 철수, 준호는 어제 왔으니 오늘은 없겠지. 혼자 한잔 먹어야겠다. 오늘은 좀 조용하게 먹고 싶은 날이기도 했다.


포장마차에 들어가기 위해 비닐 천막을 들추었다. 오늘따라 천막소리가 따뜻하게 들렸다. 항상 앉는 자리에 가보니 누군가 앉아있었다. 어? 저 사람 어제 그 친구 아니야?


"안녕하세요? 저 기억나시죠? 어제 그 서류."


"아, 네. 아.... 안녕하세요."


토끼처럼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난 어제 일도 고맙고, 반가운 마음에 인사한 건데 오늘 또 내가 놀라게 했나 보다.


"혹시.... 주문하셨어요? 괜찮다면, 어제 말한 것처럼 제가 사드리고 싶은 데...."


"아, 아뇨. 아직 주문은 안 했고, 아... 진짜 괜찮은 데...."


말을 연속 더듬는다. 부담되나 보다. 한 번만 더 물어보고 불편해하면 저 뒷자리에 앉아야겠다.


"부담스러우시면 우동 어때요? 우동은 괜찮아요?"


"아, 네.... 진짜 괜찮은데.... 그럼.... 잘 먹겠.... 습니다...."


맨날 술이 길어지고 정신없던 철수, 준호가 지겨웠던 찰나였는 데, 오늘은 빨리 먹고 조용히 있다 가야겠다. 다행히 우동도 빨리 나왔다.


"잘 먹겠습니다...."


우동을 좋아하나 보다. 불편한 분위기에서 먹으니 체하지 않을까 걱정했는 데 다행히 맛있게 먹는다. 그 아이도 나처럼 오늘 하루가 고되 보였다. 어색한 말을 주고받는 것보다 오히려 우동먹는 소리가 분위기를 편안하게 해 주었다. 이상하게 불편하지 않았다. 물론 내 생각이다.


우동을 먹고 30분쯤 그 아이와 얘길 했다. 내 명함을 건네니 그 아이도 자기소개를 했다. 이름은 이안, 24살. 나와 20살 차이가 난다.


"이안 씨, 너무 딱딱하게 말하지 말고 편하게 해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아니야, 내가 편한 게 좋으니까. 그냥 편하게 말해줘."


"... 네, 그럼 편하게 할게요."


이안은 시골에 할머니가 계시고 서울에서 자취 중이라고 한다. 작가 지망생은 아니고, 취업 준비 중이라고 한다. 되게 중요해 보이는 서류를 자기가 훔친 것 같아서 미안하다고 했다. 그녀는 여러 번 검토하면서 빨간색으로 핵심만 표시한 내 서류가 되게 멋지다고 했다. 회사 가서 버리려고 했던 나의 치부를 이렇게 멋지게 생각해 주다니 고마웠다. 힘이 있는 글을 쓰는 사람은 역시 좋은 힘을 준다. 짧았지만 힘이 났고 그래서 인상 깊었다.




우동 그릇이 차가워지고 난 후, 우리는 포장마차를 나왔다. 나는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제, 다음에 보면 인사 정도는 하자. 인연이 닿으면.... 나 위험한 사람 아닌 거 확인했지? 아닌가?"


"네, 고마워요. 저.... 그래도 과장님은 제게는 되게 멋진 분이세요."


울컥했다. 정말 이 아이 힘이 있는 아이 같다. 진심으로 난 그녀도 힘을 내고 응원하게 되었다. 구겨졌던 내가 그녀 덕분에 펴진 것 같았다. 그녀에게 말했다.


"이안 씨, 글 써 보는 거 어때?"


"네? 글이요? 무슨...."


"나 오늘 회사에서.... 진짜 죽고 싶을 만큼 되게 그지 같았거든. 근데 서류에 이안 씨 글 보고 힘이 났어. 이안 씨 글이 날 살렸어. 이안 씨 글.... 힘이 있어."


사실이었다. 그 글을 몰랐었다면 난 아마 오늘 옥상으로 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 이렇게 서있다. 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 글이, 이안 씨가 날 살렸다.


"꼭, 써봐. 잃을 거 없잖아. 응원해. 앞으로 못 만나도 내가 이안 작가 팬 1호인 거 잊지 말고."


"......."


"또 봐."


얼떨떨해하는 그녀를 등지고 집으로 먼저 향하였다. 오늘 있었던 일 중, 내가 제일 잘한 행동과 말이었다. 그래서 또 힘이 났다. 그녀는 회사라는 번듯한 포장지보다는 뒤에서 선행하고 존경받을 수 있는 중요한 사람이 될 것 같았다. 앞이 화려한 사람보다, 보이지 않지만 빛나는 사람 말이다.


오늘 내가 몸으로 느꼈다. 그래서 알 수 있었다.

지금쯤 그녀는 글을 쓰고 있을까?

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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