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겨질수록 멀리 날아가는 종이
서울 온 지 5년. 금방 나갈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옆방의 숨소리까지 들릴 만큼 벽이 얇은 이 고시원에서 나는 면접만 27번 떨어졌다. 하지만 오늘, 누군가 내 글을 읽고 힘을 냈다고 했다. 번듯한 명함을 내밀던 김 과장님이 고작 내 낙서에 살 것 같다고 말했다. 나 같은 사람의 글이 누군가를 살릴 수 있다면, 나도 조금은 의미 있는 사람이 아닐까. 가방을 내려놓고 책상 앞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방황했다. 썼다 지우기를 수십 번 반복했다.
... 이게 뭐야. 이런 걸 누가 읽어? 그냥 일기장이잖아. 백일장에서나 볼 법한 글을 보며 노트북을 닫으려 할 때, 요란한 전화벨이 울렸다. 할머니였다.
"안아~ 잘 지내고 있지? 밥은 잘 챙겨 먹고?"
"네, 할머니 잘 지내요. 회사에서 밥도 나오고 좋아요."
"너 사는 데도 한 번 보고 올라가 봐야 하는 데 미안하다."
"아니에요. 요새 일이 바빠서 집에 오래 못 있어요. 프로젝트 끝나면 한 번 내려갈게요."
도대체 할머니를 속이는 이 연극은 언제쯤 끝날까. 목소리는 갈수록 쇠약해지시는데 용돈은커녕 방세 내기에도 급급한 내 처지가 초라해 눈물이 났다. 눈물이 멈출 즈음, 벽 너머에서 낮은 흐느낌이 들려왔다. 옆방 동생 미소였다. 나와 같은 취업준비생이자, 서울에서 유일하게 의지하는 동생. 미소 울음소리를 들으니 나만큼이나 지친 것 같았다.
나는 문을 열고 미소의 방으로 갔다. 28번째 불합격 통보를 받은 미소는 소리가 들릴까 베개를 껴안고 울고 있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이미 눈은 퉁퉁 부었고 마음은 구겨져 있었다.
"... 언니, 나 오늘 떨어졌어. 28번째야. 나... 뭐가 문제인 걸까?"
대답할 수 없었다. 나도 모르니까. 나는 27번째니까. 나는 말없이 미소를 안아줬다. 지금의 미소를 안아주는 건 결국 나 자신을 안아주는 것과 같았다. 힘들다는 걸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공기는 한결 편안해졌다. 편안해진 미소를 재우고 돌아왔다.
미소라도 얼른 취업이 되기를 바란다. 위로 외엔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내가 너무 싫었다. 문득 과장님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안 씨 글이 날 살렸어."
그냥 낙서처럼 쓴 문장인 내 글을 읽고 힘이 났다고 했던 과장님.... 혹시 미소도? 나는 메모지를 꺼내 펜을 들었다. 그리고 옆방 미소의 방문 밑으로 종이를 밀어 넣었다.
'미소야. 종이는 구겨질수록 더 멀리 날아간대. - 이안'
잠시 후, 내 방 문 밑으로 쪽지가 들어왔다. 미소의 답장이었다.
'언니 너무 위로된다. 고마워. 오늘 일, 더 멀리 날아가기 위한 일이라고 생각할게. - 미소'
위로가 되어서 다행이다. 지금은 새벽 2시, 나는 다시 노트북 앞에 앉아서 고민에 빠졌다. 이런 글을 쓰면 위로가 되는 걸까? 아니, 이건 그냥 글 일 뿐이야. 그 이상 의미 없어.... 하지만 과장님은 내가 쓴 글이 힘이 있다고 말했고, 미소는 위로가 된다고 했다.
그래. 결과를 바라고 하는 일이 아니니 일단은 내 손 끝에서 나오는 흐름에 따라가 보기로 했다.
다음 날 아침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위해 일찍 일어났다. 늦게 잠들긴 했지만 피곤하지 않았다. 오래간만에 푹 잠들었던 것 같다. 잠시 노트북을 열어 어제 쓴 글들을 보았다. 부끄러워 얼른 노트북을 닫고 가방을 메고 나왔다. 복도에서 마주친 미소가 활짝 웃었다.
"언니, 안녕! 어제 쪽지 고마웠어. 그런 거 자꾸 써줘. 나 힘나거든."
"아 그래?.... 알았어."
미소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나 같은 사람의 글을 자꾸 써달라니. 밖으로 나오니 햇살에 눈이 부셨다. 지하철역으로 걷는데 주머니 속 폰이 울렸다. 역시나 불합격. 28번째다. 이제는 아무렇지 않을 법도 한데 결국 한숨이 나왔다. 하지만 오늘은 뭔가 달랐다.
"... 괜찮아. 종이는 구겨질수록 더 멀리 날아간다며."
어제한 말은 힘들 나에게 해주려한 말 같았다. 또 떨어졌지만 멀리 날아가기 위한 발판이라고 생각하며 아르바이트하러 편의점으로 갔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밤 11시. 아르바이트와 학원을 마치고 돌아와 다시 노트북을 켰다. 2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를 만큼 몰입했다. 뭐에 홀린 듯 글을 써 내려갔다. 이런 게 글쓰기인가 보다. 나.... 재능 있나?
작지만 위로 한마디가 필요한 누군가를 위한 글. 김 과장님과 미소, 그리고 세상의 수많은 '이면지' 같은 이들을 위한 문장들이 나 자신도 따뜻하게 안아주는 것 같았다. 살짝 눈물이 났다. 나.... 얼마나 힘들까....
나는 지금 나에게 글을 쓰고 있다.
그리고 나의 글이 누군가를 꼭 안아주며 말해주었으면 좋겠다.
괜찮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