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래도 되나 싶었다. 프롤로그와 목차만 보내놓고 출간 계약을 했다. 첫 번째 출간 때는 전체 원고를 완성해 투고했고 계약을 했었다. 두 번째 투고는 계약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이 역시 투고 전에 전체 원고를 써 둔 상태였다. 책이 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일단 전체 원고가 있어야 출판사에서 판단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였다. 그런데 막상 이미 쓴 원고는 버려지고, 전혀 쓰지도 않은 내용으로 계약을 하게 되다니. 참, 세상일 어찌 될지 모를 일이다.
1. 빠르게 출간 계약까지는 완료했는데 바로 아이들 방학이 시작됐다. 3주를 쉬고 아이들 개학과 동시에 시작된 집필 작업. 일단 세 꼭지 정도 작성한 후 미팅을 하자는 말에, 얼른 다섯 꼭지를 썼다. 다양한 방식의 원고를 모두 한 번에 의논하고 싶어서였다. 챕터별로 느낌이 다를 수 있으니 서로 다른 느낌의 조화가 괜찮은지 묻고 싶었고, 내가 에피소드를 다루는 다양한 방식 중 어떤 게 더 나아 보이는 지도 묻고 싶었다. 원고를 보내고 나니 또다시 두근두근. 과연 이 원고가 출판사의 의도와 맞을 것인가. 곧 다음날 아침에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이렇게 급하게 만나자는 건 방향 수정이 필요해서일까?' 쓸데없이 걱정부터 하는 내가 이런 생각을 한 걸 알았는지 바로 이어 메시지 하나가 더 도착했다. "저는 전체적으로 좋았어요. 작가님이 걱정하신 부분도 저는 괜찮았고요."
2. 그로부터 한 달 후, 전체 원고 작성을 끝냈다. 뒤이어 담당 편집자님도 정해졌다. 내 원고의 첫 번째 독자인 출판사 담당자들이 제대로 뜯어보고 뒤집어 볼 시간이 된 것이다. 첫 번째 독자이긴 하지만, 일로 이 원고를 바라볼 테니, 피드백이 너무 날카롭고 딱딱하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드디어 첫 미팅 날, 나의 걱정은 기우였음이 밝혀졌다. 미팅을 위해 일단 급하게 한 번 읽고 왔다는 편집자님은, 내 글에 나만의 독특한 생각이 묻어나는 걸 느꼈다고 말했다. 그 독특함이 좋았고, 그걸 잘 살리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그간 내가 독특하다는 생각을 종종 했다. 그게 좋은 걸까 나쁜 걸까 헷갈리는 날들도 많았다. 그런데 그 독특함이 좋다는 피드백을 받은 것이다. 편집자님과 원고를 주고받으며 빼고 추가하고 수정하는 날들이 훨씬 따스해졌다.
3. 원고가 책이 되는 지난한 과정 동안 우리는 여러 번 줌으로 만났다. 그런 미팅에는 출판사의 프로젝트 담당자가 늘 함께 했다. 사실 편집자님에 비해 나와 직접적으로 주고받는 대화가 적은 편이다 보니 업무적인 느낌이 강한 관계였다. 그런데 어느 날 미팅 중에 이런 말을 했다. "저는 아직 아이가 없는데요, 이 원고를 읽으면서 아이를 낳아봐도 괜찮겠구나, 이렇게 사는 것도 괜찮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와 다른 환경, (아이가 없다는) 너무 다른 상황에 있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해주니 이상하게 더 기분이 좋았다. 사실 아이를 낳는 것이 우리의 삶을 완전히 흔들 수도 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니 아이를 낳을 것인가 말 것인가는 전적으로 개인의 선택이 되어야 한다. 다만, 그렇다고 해도, 아이를 키우는 삶이 가진 행복을 평가절하하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내 이야기를 꺼낸 거였는데, 자연스레 받아들여준 그 시각 덕분에 이미 쓰인 내 원고에 대한 자신감이 꽤 상승했다.
4. '혹시 내가 육아를 미화하고 있는 걸까?' 반복해서 원고를 보다 보니 그런 걱정이 들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육아가 얼마나 힘든지, 그게 여자들의 삶을 얼마나 복잡하게 만드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런 글을 읽다 보니, 육아를 하면서도 나를 잃지 않았고, 아이들과의 사랑으로 나를 다시 세울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비현실적인 것처럼 느껴졌다. 혹시 내가 지나치게 긍정적인 것 아닐까, 내가 너무 독특한 것 아닐까, 이게 누군가에게는 미화로 비치진 않을까 걱정이 됐다. 여전히 반짝이는 엄마들에게, 여전히 반짝이는 날들을 보여주고, 아이들만큼이나 나를 소중히 여기면서 더 반짝여보자고 말하고 싶었는데, 그렇게 말해도 괜찮은 건가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어느 미팅 날 그런 이야기를 했다. 이 원고가 육아를 미화한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그날 편집자님이 이렇게 말했다. "아니요. 저는 원고를 보면서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어요. 오히려 반짝이는 날들을 잘 꺼내 놓았다고 생각해요."
5. 아마 마지막 미팅 때였을 거다. 책의 제목을 정하려고 만났던 날이던가. 한참 논의하던 중에 다시 글 이야기로 돌아갔다. 그날 한번 더 편집자님이 고운 피드백을 들려주었다. "편집하면서 마음이 좋아지더라고요. 그래서 이 책 편집하는 동안 좋았어요. 이 원고 덕분에 생각이 전환되는 부분도 많았고요. 아, 이걸 이렇게 생각할 수 있구나, 나도 이렇게 해보면 좋겠구나 싶었어요." 이 얼마나 아름다운 피드백인가. 책이 되어 독자들에게 닿았을 때, 독자들도 이렇게 생각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사진: Unsplash의 Adam Jang
예전에 VACAY 창간호를 만들 때, 한 창업가의 인터뷰 기사를 작성한 적이 있다. 원고 검토 메일에 대한 회신을 받은 친구가 "대표님이 원고 너무 좋다고 감사하다고 꼭 전해달래." 라고 말했고, 나는 "그래? 다행이다."라고 답했다. 내 대답을 듣고 친구가 했던 이야기가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다. "소령아, 니 원고 정말 좋아. 나는 당연히 좋다고 하실 줄 알았어. 전혀 걱정도 하지 않았어. 네가 원고를 잘 썼으니까 상대방이 좋다고 하는 게 당연한 거야." 그 말을 듣고 내 글에 좀 더 자신을 가져봐야지 생각했는데, 여전히 나는 자신이 없다.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건 아무 소용이 없지 않은가. 독자를 위해 쓰는 글은 독자가 좋다고 해야 좋은 거다. 그래서 늘 걱정주머니를 가득 끌어안고 있는 나는, 이번 작업을 함께 한 출판사 분들에게 감사할 수밖에 없다. 첫 번째 독자로서 따뜻한 피드백들을 전해줬으니까. 이번에도 나는 그들이 준 피드백 덕분에 조금 더 자신있게 내 책을 내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