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우울했으니까

운동 15일 차

by 쏘냐 정

새벽을 원하면서도 나가지 못한 지 3주가 됐다. 컨디션이 좋지 않았고, 여러 가지로 바빴고, 새벽에 나가 운동할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중간에 조금씩 걷기도 했는데 기록도 하지 못하고 지났다. 마지막 일지가 12일 차 이야기였는데, 오늘은 15일 차인 이유는, 그래도 전혀 하지 않은 건 아니라서 기억하고 싶은 이틀의 운동기록이 있기 때문. 그건 여유 있는 날 기록하기로 하고 일단은 그녀의 운동 15일 차 기록부터 이어나가 보기로 한다.


그녀는 술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술 마시는 분위기는 좋아한다. 그녀가 처음 술을 마셔본 건 대학 1학년 때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건 아무리 마셔봐도 도무지 술이 맛있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술이란 건 맛이 없는 거라서 도저히 좋아할 수가 없다. 하지만 술이 사람들과의 왁자지껄하고 유쾌한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건 좋았다. 그래서 그때의 그녀는 술자리를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즐긴 쪽이었다. 그런데 대학을 졸업하면서부터는 진짜 어른이 되어서인지, 술자리에서조차 사람들이 순수해지지 않는다고 느꼈다. 대부분의 술자리가 회사 회식자리였고, 그때부터는 술 마시는 분위기도 퇴색되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부터 술은 더더욱 먼 것이 되었다. 하지만 가끔 정확히 어떤 기분을 의미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기분을 내고 싶을 때 맥주를 한 잔씩 하기도 한다. (아, 사실 그녀도 와인은 좋아한다. 그런데 이상하게 와인은 늘 그녀 머릿속 술 카테고리에서 빠져있다. 음료도 술도 아닌 그 무언가라고 해야 할까.)


어제, 그녀는 맥주를 한 캔 땄다. 기분이 좋지 않아서 맥주 생각이 난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낮에 별것 아닌 일이 있었고, 그 때문에 기분이 나빠졌다. 더 기분이 나쁜 건 그게 정말 별 것 아닌 일이라는 거다.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하고 그냥 남편에게만 좀 꿍시렁거리다가 잊어야지 했는데, 저녁을 먹으면서도 아직 그 기분이 사라지지 않은 걸 깨달았다. 그때 갑자기 '아, 맥주를 한 캔 마셔야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맥주를 마시다가 마음먹었다. '내일은 새벽에 나가야겠어.'


맥주를 마셔서인지 일찍 잠들지 못했고, 몇 번이나 잠이 깨서 화장실에 가느라 잠을 설쳤지만, 6시 알람에 바로 일어났다. 새벽 여섯 시. 새벽에 나서지 못한 3주 사이 6시는 대낮처럼 밝은 시간이 되어 있었다. 정말이지 시간은 늘 정직하게 흘러간다. 지구도, 태양도, 달도.. 모두 참으로 부지런하고 성실하다. 아무 생각 없이 걷기가 오늘 그녀의 목표. 운동을 위해서가 아니라 명상을 위해서 나선 길이니 머리를 비워보기로 했다. 오늘은 욕심도 부리지 않기로 했다. 사실 며칠 전부터 다시 무릎이 아프다. 그러니 달리겠다는 건 욕심일 터. 걷자. 조금 더 천천히.


생각하기보다 둘러보면서, (막상 천천히 걷지는 못하고) 부지런히 걷는데, 평소와는 다른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남자아이 둘이었다. 초등 고학년쯤 됐을까. 처음 그녀가 그 아이들을 본 건 첫 번째 다리 밑의 벤치에서였다. 남자아이 둘이 앉아있길래, 이 시간에 나와 뭘 하고 있는 걸까 싶었다. 그런데 조금 지나니 그 아이들이 그녀를 추월해 앞으로 쑤욱 뛰어나가는 건 아닌가. '아, 저 아이들도 운동하러 나온 거구나.' 그때부터는 뛰는 아이들은 줄곧 그녀 앞에, 걷는 그녀는 그 아이들 뒤에 있게 됐는데, 아이들의 뒷모습이 괜스레 훈훈했다.


아이들은 뛰다 쉬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힘들면 잠시 벤치에 앉았다가도 다시 일어나 뛰었다. 한 사람이 힘들어하면 다른 친구가 어깨를 툭툭 친다거나 등을 토닥토닥하면서 함께 나아가고 있었다. 그녀와 반환점까지도 비슷했던 두 아이는 그녀가 집으로 들어올 때까지도 그녀 앞을 뛰고 있었다. 아직 조금 더 뛸 생각인 듯했다. 그녀가 집으로 오기 위해 건너는 다리 위에 서서 잠시 숨을 고르며 물아래를 바라보더니, 또다시 한 친구가 어깨를 툭툭 치는 걸 신호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 뒷모습을 보면서 집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저 아이들은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있을까? 궁금했지만 물을 수 없으니 상상만 해 본다. 같은 시간에 또 나가면 그 아이들을 또 만날 수 있을까? 오늘 그녀는 예상치 않은 위로를 얻었다. 서로를 응원하며 달리는 아이들 덕분에. 역시 일어나 나가기를 잘했다고, 자신을 칭찬해 본다.



처음으로, 운동하고 들어오는 자신을 찍어봤다. 선명한 거울은 좀 부담스러우니까 엘리베이터에 비친 덜 선명한 모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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