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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쏘냐 정 Aug 12. 2024

사원시절 회의실에서 평생 간직할 말을 들었다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든 말

사원 3년 차 즈음, 나는 칭찬에 박한 조직에서 무엇이든 더 잘하려고 애쓰는 사원으로 살고 있었다. 그해 내가 몸담고 있던 조직에 큰 변화가 생겼다. 매해 조금씩 변화가 있기는 했지만, 조직 장이 바뀌는 건 입사 후 처음. 상사들이 긴장하며 준비하는 게 눈에 보였다. 저렇게 유난 부리는 데는 이유가 있겠지. 나도 덩달아 진지해졌다.


"첫 만남 자리가 중요해. 첫인상인데 우리 부서 애들이 실수하면 안 되지."


유난히 경쟁에 민감하고 보이는 성과에 예민한 상사가 우리를 회의실에 모아놓고 한 말이다. 팀 안에 여러 개의 부서가 있다. 업무 단위로 각 부서가 나뉘어 있으니 일할 때 서로 협력하는 관계다. 그런데 협력만큼이나 경계하는 사이이기도 했다. 아무것도 모를 때는 왜 저러나 싶었는데 곧 이유를 알았다. 하나의 프로젝트를 성공한 공이 여러 부서에 동시에 돌아가지 않는 탓이었다. 하지만 새 팀장 맞는 자리에서까지 그래야 한다고? 이건 프로젝트가 아닌데? 과한 준비가 아닌가 싶었지만, 그날 우리는 회의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각자 프로젝트 브리핑을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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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하고 맞은 D-day. 새 팀장님 환영 회의가 시작되었다. 이런저런 인사말이 오간 후 갑작스럽게 질문이 던져졌다. "런칭전략에 000시리즈 담당자가 누구죠?" 앗. 내 프로젝트였다. "접니다." 아직 사원인 나에게 맡겨진 가장 대중적인 라인이었다. 대중적이라는 건 '전략' 측면에서 별다른 관심이 없는 제품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매출 비중이 가장 크기 때문에 중요하지만, "그건 알아서 팔 수 있지?"로 끝나는 어차피 팔릴 제품. 그런데 왜 지금 그걸 묻는 거지?


"000 시리즈의 경쟁 제품이 뭐라고 생각해요?" 다음에 이어진 질문이다. 경쟁 제품은 제품 전략 수립 시 기본적으로 고민하고 작성하는 항목이다. 그러니 어려운 질문이 아니다. 간단히 생각하면 말이다. 문제는 이 자리가 그렇게 기초적이고 뻔한 질문을 할 만한 자리가 아니라는 것. 순간 알아차렸다. 지금 팀장님은 전략 작성 내내 나를 괴롭히던 복잡한 역학관계를 묻고 있다는 걸 말이다.


"000시리즈의 경쟁 제품은 타사 제품이 아닌 당사 프리미엄 라인 제품들입니다." 


보통 경쟁 제품에는 경쟁사의 비슷한 포지션 제품을 적는다. 실제 시장에 나가면 나란히 비교되는 경쟁제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000시리즈 판매 전략을 짜는 내내 날 힘들게 한 건, 경쟁사 제품 대비 비교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가 아니었다. 더 어려운 포인트는 당사 상위 제품과 어느 정도 간격을 두고 어느 수준으로 커뮤니케이션해야 하는가였다. 000시리즈는 좋은 스펙을 가지고 있는 제품이지만 프리미엄 라인과 겹치는 스펙은 전면에 내세울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났다. 그걸 빼고 나면 확연히 허리를 차지하는 그저 그런 제품으로 보였다. 문제는 그러면서도 어느 제품라인보다 많이 팔아야 한다는 점이다. 내 담당 제품만큼이나 세심하게 프리미엄 라인 스펙과 전략을 살펴야 했던 이유다. 물론 나 혼자 이러한 결론에 도달한 건 아니다. 조직은 시스템이다. 물을 때 답해주는 상사들이 있었다. 그날 회의가 끝나고 나왔을 때, 누구보다 뿌듯해하던 과장님 얼굴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새 팀장님과 첫 대면이 그렇게 지나고 업무가 시작됐다. 업무 상 자주 회의하고 보고했다. 그러던 어느 날 팀장님이 지나가듯 말했다.


"정 사원은 thinking이 좋아."


글로벌 마케팅팀. 외국인과 일하는 시간이 많은 탓에 자꾸 말에 영어가 섞였다. 심지어 팀장님은 미국에 본사를 둔 글로벌 기업 미국 본사 출신이다. 한국말과 영어가 뒤섞인 thinking이 좋다는 말이 어색함 없이 직관적으로 이해된 건 그래서였다. 


"이 전략이 좋아." "이번 프로젝트 좋았어." "수고했어." 이런 말과는 결이 다른 말. 눈에 보이는 전략 같은 결과물이 아닌 과정 자체를 칭찬하는 말. 머리를 쥐어뜯고 여기저기 물어보고 고민하고 그렇게 결국은 문장 하나 만들어내는 '과정'을 봐주었다. 이 말은 들은 날, 나는 내가 했던 수많은 보고서 속에서 내가 했던 생각의 과정들을 살폈다. 앞으로 더 좋은 thinker가 되기 위한 힌트를 얻기 위해서였다.


게다가 이 칭찬은 프로젝트 결과가 아닌 '나'를 지칭했다. 하나의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끝났을 때는 다음 프로젝트도 잘할 수 있으리란 자신감이 생긴다. 그게 비슷한 프로젝트일 때 말이다. 여기에서 주인공은 프로젝트다. 하지만 나의 thinking에서 주인공은 '생각하는 나'다. thinking 좋은 사람이라는 칭찬 앞에서 나는 어떤 일이든 온 힘 다해 생각할 때 결국 답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자신감을 얻었다. 


15년은 된 이야기. 하지만 이 말은 잊히는 대신 여전히 유용하게 기능한다. 새로운 일 앞에 섰을 때, '이건 해보지 않았잖아.' 대신 '나는 좋은 생각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이잖아.'가 가능해졌다. 


현실에서 우리는 결과물에 대한 칭찬을 더 쉽게 한다. 나도 그렇고 상대방도 그렇다. 그게 과연 결과물에만 의미가 있어서일까? 그렇지 않다. 과정보다는 결과가 더 잘 보여서일 뿐이다. 그날 이후로 나는 좋은 결과 앞에서 과정 속의 나를 칭찬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나쁜 결과 앞에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생각해 온 길을 더듬는다. 거기에서 무엇이 틀어졌는지를 찾는다. 


우리 중엔 thinking이 좋은 사람이 엄청 많을 거다. 그런 칭찬이 흔하지 않아서 아직 들어보지 못했을 뿐. 그래서 내가 들었던 칭찬을 나누고 싶었다. 무언가 좋은 결과를 만들어낸 적이 있다면 그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 생각의 숲을 치열하게 탐험한 결과다. 결과 앞에 좋은 생각을 해낸 우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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