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옐로 Mar 29. 2022

암살범의 마을에서

피오다웅(Piodão)

 오지라는 단어를 소리내어 말해본다. 그러자 마법처럼 외로워지고 편안해진다. 오지라는 단어에서 새어 나오는 어떤 결락을 좋아한다. 때로 인간이란 아무도 찾지 않고,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에서 자유로움을 느끼는 것일까. 그래서 오지라는 말은 어쩐지 할머니의 무덤만큼이나 고독하고 처연하지만, 그것은 제 나름대로 비길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다. 나는 포르투갈에서 '가장 아름다운 오지'라는 수식어가 붙은 마을, Piodão에 있다.

 


 마을은 포르투갈 중부지방 별의 산맥(Serra da Estrela)과 로우싸 산맥(Serra da Lousã) 사이 아쏘르 산맥(Serra do açor)이라는 곳에 고이 숨어 있다. 지금은 포르투갈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로 손꼽히는 곳이지만, 사실 포르투갈판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널리 알려진 14세기 페드루와 이네스의 비극적인 사랑이야기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마을이기도 하다. 내가 이 마을을 알게 된 것도 바로 그 이야기 때문인데, 당시 이네스를 잔인하게 살해한 암살범 세 명 중 잡히지 않은 한 명은 끝내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 암살범이 숨어든 곳이 바로 이 마을, Piodão이었다고 한다. 현재 포르투갈에서 가장 아름다운 역사마을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오래전 잔인한 암살범이 숨어 지냈던 마을이라는 사실이 이곳을 찾는 여행자에게 기묘한 느낌을 선사한다.  

    

 암살범의 시간은 이제 수백 년의 시간과 함께 사라지고 존재하지 않는다. 마을은 이제 몇몇 촌부들만 거주하는 그저 평화로운 곳이다. Piodão을 처음 방문하면 어쩌다 이런 곳에 사람들이 정착했을까 라는 생각부터 들 정도로 산의 경사면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마을에 도착하기 전 멀리서 우리는 차에서 내려 마을 전경을 눈에 담느라 분주하다. 아이는 스케치북을 꺼내 그림을 그린다. 한 폭의 그림이라는 말은 이제 진부하기 짝이 없는 표현이다. 마을은 마치 계단식으로 만들어진 원형극장의 그것과 유사하다. 아기자기한 검푸른 지붕의 편암집들이 모여 작은 마을을 이루고 주위로는 계산식 농지들이 울타리처럼 둘러쳐져 있다.      



 마을 초입에는 18세기에 지어졌다는 교회가 우뚝 서 있다. 다소 어두운 톤의 집들과 달리 먼 대서양을 생각나게 하는 하얗고 푸른색의 교회다. 언젠가 백설공주 동화 속에서 본 것만 같은 그런 교회. 왠지 기분이 좋아지는데 그도 그럴 게 이 교회는 여행자로 하여금 이제 당신이 동화 속 마을에 들어섰다는 느낌을 물씬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교회를 시작으로 조용히 마을을 거닐기 시작한다. 집의 벽은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편암을 쌓아 만들었고, 지붕은 예의 포르투갈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지중해식 붉은 기와 대신 크고 넓적한 점판암을 겹쳐 만들었다. 산에서 내려오는 개울물이 마을의 집들을 휘돌아 줄기차게 내려온다. 인기척이 드문 마을에 그 물소리만 너무 청명해서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든다. 자세히 보니 집마다 문에는 십자가가 걸려있다. 지나가는 마을 촌부에게 물으니, 어깨를 으쓱거리며 악령을 쫓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악령이라는 소리에 나도 어깨를 으쓱거린다.     


하늘로 오르는 계단


 미로 같은 골목을 헤매다 어느 집 앞에서 발걸음이 멈춘다. 벽에는 무언가 글귀가 쓰여있다. 가만 읽어보니 확실치 않지만, 끊임없이 도전해서 성취하라는 내용의 글이다.(나는 그것이 포르투갈의 국민 시인, 미겔 토르가(Miguel Torga)의 ‘시지프스’라는 시임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차분히 읽어보다가 그중 한 문장이 불쑥 눈에 들어온다.      

 ‘Só é tua a loucura.’ 광기는 오직 너의 것.      


 삶은 시지프스의 그것처럼 영원한 반복이다. 그리고 그 반복은 어떤 광기를 동력으로 삼을 것이다. 삶의 본질을 이야기하는 시 앞에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가 나는 외면하듯 발걸음을 뗀다. 나는 아직 인생을 알지 못한다. 


 포르투갈의 시인이자, 극작가, 수필가였던 미겔 토르가는 이 마을을 가장 사랑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의 추모비도 이 마을이 내려다보는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지금도 그는 이곳을 내려다보고 있을 것이다.     

 마을을 빠져나오는 길에 ‘아나 마리아 호드리게스 로페스(Ana Maria Rodriguez Lopes)’를 만났다. 눈이 무척 큰 귀여운 시골 아이다. 책가방을 메고 걷는 어린아이가 정겨워 반갑게 다가가 이름을 물었더니 아이는 큰 눈을 끔뻑거리며 긴 이름을 수줍게 말한다. 나는 아이의 이름을 잊지 않으려는 듯 두 번 소리 내어 말해본다. 외국인의 포르투갈어 발음이 이상하고 재미있었는지 아이가 다시 수줍게 웃는다. 그리고 나는 다시 마을 초입에 돌아오고서야 아이의 성을 불현듯 생각한다.      


 디오구 로페스 파세쿠(Diogo Lopes Pacheco)는 이네스를 살해한 암살범의 이름이다. 그리고 그의 성인 로페스와 파세쿠가 아직도 이 마을에 남아있다는 이야기가 그제야 생각났다. 정말 아이가 암살범의 먼 자손일까. 정말 기막히게 우연히도 암살범의 자손을 만난 것일까. 그런 생각들로 갑자기 머리가 복잡해진다. 마을 초입은 어느새 기념품 가게를 서성이는 관광객들로 분주하다. 딸아이는 무얼하려는 지 땅바닥에 널린 편암 조각들에 정신이 팔려있다. 우리는 해가 지기 전 서둘러 Piodão을 빠져나온다. 구불구불한 룸미러 속으로 Piodão이 숨바꼭질하듯 들어왔다가 사라지고 있었다.



피오다웅 (Piódão)

포르투갈 중부 아소르 산맥(Serra do Açor)의 가파른 절벽에 위치한 작은 마을. 푸르고 검은색의 편암 벽, 슬라브로 덮인 지붕, 그리고 파란색으로 칠해진 나무 문과 창문이 특징인 전통 가옥들이 아름답게 자리잡고 있다. 주민들은 주로 농업, 축산업, 그리고 양봉업에 종사한다. 


작가의 이전글 순례자의 도시를 걷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