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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태경 May 31. 2023

속이 허한 아침

어쩌다 잡채

며칠 전부터 입맛 때문인지, 뱃속이 그런 건지 허전하다.

끼니를 맞춰 먹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안 먹는 것도 아닌데, 속이 허하다.

이럴 때는 고기를 먹어주면 좀 덜할 텐데. 고기는 영 땡기질 않는다.

캠핑 가서 매캐한 연기에 콧물 눈물 빼가며 피운 불에, 석쇠 올려서 버섯이랑 가래떡을 곁들여 먹는 고기라면 모를까.

생긴 건 먹방을 찍게 생겼는데.

누군가를 먹이기 위한 고기요리는 해도, 혼자 먹어야 할 때는 고기를 재료로 쓰는 일이 드물다.


봄이 되면서 장에 쏟아져 나오는 나물들만 먹어서 그런가.(억지스럽지만 매년 이맘때, 이런 증상을 보이는 걸 보면 내 몸이 그렇단다)

잠시 숙였다 일어서면 하늘이 핑 돈다. 버드나무 휘청거리는 몸도 아닌데 가끔 낮에 별도 본다.

물론, 밥은 먹었다.

물론, 다이어트도(다욧이 뭐 드래요ㅎ) 안 한다.


전날 먹는 둥 마는 둥 잠을 청하고, 이른 새벽에 눈이 떠져 집안을 서성거린다.

이사와 다시 시작한 미니 정원을 돌보는 일로 하루를 시작한다.

대부분 분양 받아오거나, 씨를 심어 싹을 틔워 낸 녀석들이라 더 애착이 간다.


자랑질까지 하는 걸 보면 팔불출이 따로 없다. 욘석들땜에 눈뜨는 아침이 행복하다.


분무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안개로 화초들 아침욕을 시켜주는데

배고프다. 배가 열렬히 고프다.

서둘러 정원놀이를 끝내고 냉장고를 뒤적거린다.


장에서 사다 날랐던 푸성귀들이 쪼매씩 비닐봉지에 묶여져 있다.

1단에는 2,000원, 2단을 사면 3,000원.(거부하기 힘든 셈이다. 늘 큰 손이 문제다.)

금방 밭에서 묶어다 놓은 듯 싱싱한 시금치에 욕심을 불렀다.(이런 걸 보면 나란 사람 물욕이 강한가 보다. 돈욕심이나 많을 일이지ㅜㅜ)

데쳐 무친 먹다 남은 시금치나물 그릇이 먼저 눈이 들어왔다.

통오이에 칼집 내서 부추 듬뿍 넣고 버무려 잠재워놓은 오이소박이.

만지면 똑~하고 부러지는 어린 열무와 얼갈이를 맛나게 짠내 나는 젓갈에, 벌건 고춧가루 써서 칼칼하게 버무려 놓은 얼갈이열무김치.(흔희들 열무김치라고 하는데 같이 들어간 얼갈이가 서운타할테니)

작년에 담았던 김장김치(맛난 김치가 시간에 농익어졌을 테니 단어만으로 침이 넘어간다)

양배추(내겐 속 쓰림에 이보다 더 좋은 약이 없다)ㆍ 감자(냉장고에 넣으면 안 좋다 하지만 실온에선 오래 버티질 못하니 고문 아닌 고문을 할밖에)ㆍ사과ㆍ 청양고추ㆍ 두부(들기름에 지글지글 구워 먹을까).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칡즙(저걸 버려 말어, 먹어보면 괜찮단 말야)ㆍ 느타리버섯ㆍ파프리카ㆍ당근……

이 정도면 그려지는 그림.

선반에 쓰고 남은 당면이 생각난다.

오늘의 요리를 예견했는지 장에서 찰딱찰딱 반죽을 치대어 튀겨주는 어묵집에서 뜨끈한 매운 핫바를 사 먹다 넓적한 어묵을 몇 장 사 온 게 있으니 더 이상 고민할 것도 없이 '잡채'.

손님용으로 요리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고기를 넣지 않으니 딱일세.

당연히 양파, 다져 냉동고에 얼려 놓은 마늘이 있으니 더없이 만족스럽다.

낙오된 오이는 소금에 절여 꼭 짜 볶아 넣으면, 식감이며 산뜻한 맛을 내주겠지만 이 녀석까지 추가하기엔  당면 양이 턱없이 적어 패스.


'타닥타닥'

'지글지글'

'찹찹찹'

기름진 냄새가 진동을 한다.

썰고, 데치고, 볶아, 들기름 넣어 사이좋게 어울리라고 휘적휘적 섞어 화룡점정 통깨 아낌없이 뿌려준다.

요래요래 간종거려 담아 냉동실에 숨어 사는 흑임자(검은깨)까지 지나가는 눈마냥 살포시 뿌려준 접시 앞에 젓가락 들고 잡채와 마주했다.

근심 걱정 잠시 잊고 무릉도원을 경험한다.

사진을 찍는다고 당면 가닥 모아모아 담았더니 제법 그럴싸한 ‘잡채’ 한 접시


허하던 속이 채워진 것인지, 양으로 채워진 것인지.

두 접시를 먹고 불뚝해진 배는 한심하지만, 허리가 쫙~ 펴지며 행복해진다.

살기 위해 먹는가.

먹기 위해 사는가.

당근이 말밥이듯이, 당근~ 먹기 위해 삽니다.




세상은 뜻하지 않은 작은 행복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어쩌다 ‘잡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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