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외 종이 글씨
2014년 갑오년 초여름..
모르는 발신번호가 연신 울렸다. 같은 아파트 807호에 살고 있는 한 아주머니의 급한 전화였다. 주차하다가 그만 내 차 앞 범퍼를 살짝 부딪쳤다고 차를 보시고 이상 있으면 연락 달라는 양심 전화였다. 그냥 봤을 때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자세히 보면 앞 범퍼 쪽이 약간 들리고 스크래치가 나 있었다. 별로 대수럽게 생각하지 않고 ‘제가 알아서 하겠다’고 한 후 마무리를 지었다.
다음날 오후,
현관 앞에 참외 한 박스와 ‘정말 죄송하고 고맙습니다’라는 메모지가 함께 들어 있었다.
참외에 대한 느낌은 별 관심이 없었고 참외를 둘러 쌓인 포장 종이에 눈이 갔다.
캘리그래피 재료는 어떤 것도 가능하다는 말을 지난 시간에 언급을 했었다. 참외를 더 돋보이게 해 주기 위해 재질은 기름종이였다. 일반 한지에서 느끼지 못한 매끄러운 재질이어서 그 위에 붓으로 글씨를 쓰는 느낌 또한 달랐다. 보통 기름종이 위에 글씨를 쓸 경우에는 먹물 자체가 잘 흡수가 안 되는 경향이 있어 글씨가 기름종이에 흡수가 되지 않고 물방울처럼 일어나 본인이 원하는 글씨를 구사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한 예로 초창기 때 퍼포먼스를 하기 위해 풀 먹인 광목천을 사용한 적이 있었는데 먹물이 흡수가 안 되어 고전한 기억이 있다.
그 이후에는 다시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원단 고를 때 풀 먹임의 유무를 반드시 확인하는 절차를 꼭 밟는다.
참외 종이는 기름종이였지만, 그다지 먹물을 많이 흡수하지는 않았다. 기름 투입의 용량의 차이라고 생각했다. 아무 생각 없이 참외 싸는 종이가 별것 아니라고 지나쳤다면 그냥 쓰레기로 산화되었을 ‘참외 싼 종이’는 재활용을 거친 후 다시 작품으로 태어났다.
지난 2010년 나의 대표작 SBS 수목드라마 ‘나쁜 남자’ 타이틀 서체 역시 사각티슈에 글씨를 써서 탄생한 작품 중에 하나다. 기본적인 한지와 서예 붓으로 글씨를 쓰되, 상황의 변화가 필요할 때는 주저하지 말고 ‘발상의 전환’을 하라는 주문을 하고 싶다.
그게 캘리그래피만의 특권이고, 차별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