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등학교 때 내신이 6등급이었다. 15등급까지 있었으니 한 중상급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첫 번째 시험관 시술의 배아 이식하는 날이었다. 다행히 시술 날이 토요일이라 와이프랑 병원을 같이 갔다.
드디어 우리는 처음으로 시험관 시술의 배아 이식을 시행했다. 시술은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시술실에서 삼십 분도 채 되지 않아 와이프가 나왔다.
그런데 딱 한 개 이식한 건데 배아가 아주 무거웠던 것일까?
와이프는 수박 덩어리 안듯이 두 손으로 아랫배를 조심스럽게 움켜쥐고 만삭의 임산부처럼 뒤뚱거리며 걸어왔다. 얼굴에는 함박웃음을 지으면서 손에는 삼일절 태극기 흔드는 것처럼 뭔가를 연신 펄럭이고 있었다. 이번에 이식한 배아 사진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상급의 배아이고 다른 병원에서는 1등급으로 부른다면서 흐뭇한 표정으로 사진을 건네줬다.
'음... 등급? 1등급? 이거 배아도 고등학교 내신처럼 등급이 있는 것인가?'
배아를 처음 봤을 때의 느낌은 올록볼록 주름진 게, 마치 잘 구운 호두과자 호두과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부분이 상급의 자질을 갖춘 것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최고로 우수한 배아라고 하니 자꾸만 눈이 갔다.
그렇게 계속 보다 보니 둥글둥글하고 주름도 뚜렷뚜렷하니 예쁘게 생긴 거 같았다.
'요 녀석이 나중에 크면 내신 중 상급인 나보다 공부는 훨씬 잘하겠구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출근하려고 대문을 나서면서 현관 앞에 놓인 신발을 보고는 꼬까신 동요가 나도 모르게 흘러나왔다.
첫 번째 시험관 피검사 결과를 며칠 앞두고 우리는 돌잡이 아기 걸음마 신발을 샀다.
'개나리 노란 꽃그늘 아래
가지런히 놓여있는 꼬까신 하나
아가는 살짝 신 벗어 놓고
맨발로 한들한들 나들이 갔나
가지런히 기다리는 꼬까신 하나'
와이프는 시험관 시술을 시작하자마자 난임 카페에 가입했다. 같은 처지인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여러 가지 난임 공부를 한다고 했다. 그렇게 이것저것 알아보는 것 같더니 느닷없이 아기 신발을 사러 가자고 했다.
카페에서 어느 누가 피검사 결과 전에 예쁜 아기 신발을 사서 현관 앞에 놓아두면은 그 시험관 차수에서 임신할 수 있다고 했다는 글을 봤다고 했다. 또 예전에 그런 속설도 들어본 적이 있다고 했다.
삼신할머니가 현관 앞에 놓인 아기 신발을 보고는 '아 이 집은 간절히 아기를 원하는구나 점지해 줘야겠다.' 하면서 그 신발에 꼭 맞는 아기를 집으로 들여보낸다면서….
"어구.... 그런 미신 같은 거 쓸데없이 믿지 말고 몸에 좋은 그런 음식이 뭔지나 알아보고 챙겨 먹을 생각이나 해"
내가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건 진작에 다 알아봤지. 요새 저녁때 내가 추어탕 많이 차려주잖아. 그게 착상에 그렇게나 좋다네"
와이프가 자랑하듯이 말했다.
"아 그래? 그거 추어탕 아주 좋더라.
맛도 끝내주고 피곤함도 싸 가시는 것 같고. 그거 매일 차려주라"
"OK. 내 그럴 줄 알고 추어탕이 한 팩에 이만 원이나 하는데 돈 아깝다는 생각 안 하고 왕창 사다 놨지.
그러니까 추어탕 매일 차려줄 테니 한번 백화점에 가서 아기 신발이나 구경하자"
그렇게 추어탕 매일 차려준다는 와이프의 꼬임에 넘어가 내키지는 않았지만, 백화점 아동 매장으로 가게 되었다.
그때는 그렇게 추어탕이 참 좋았다. 그런데 6년 동안 추어탕 수백 그릇은 먹은 탓일까, 지금은 추어탕 생각만 해도 입에서 미꾸라지가 튀어나올 것처럼 아주 징글징글하다.
아동 매장 입구에는 초등학교 입학식에서 짝꿍 손 붙잡고 있는 꼬맹이 신입생들처럼 한껏 멋을 부린 어린이 마네킹들이 깜찍한 포즈로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바로 그 뒤에 신생아, 돌잡이 아기 코너가 있었다. 여기는 들어서자마자 '아구'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옷이며 모자며 얼마나 작고 올망졸망하던지. 매대에는 장미의 계절 5월인데도 불구하고 갓난아기 장갑들 여러 개가 쭉 늘어져 있었다. 모두 다 하얀색이었고 디자인은 조금씩 달랐다. 그런데 모두 다 벙어리 장급들이었다. 나는 아기들은 손가락이 작아 벙어리 장감만 끼는 줄로만 알았다.
"갓난아기들은 추위를 엄청나게 타나보다 여름이 코 앞인데 아기들 장갑이 이리도 많네. 그것도 모두 벙어리장갑이야. 귀엽다 그치?"
와이프에게 장갑을 가리키며 말했다.
"푸하하하. 그건 벙어리장갑이 아니라 아기들 손 싸개야. 자다가 자기 얼굴 긁을까 봐 손에 씌워놓은 거라고"
와이프가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손 싸개인지 벙어리 장갑인지, 거기는 내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세상이었다. 마치 팅커벨의 나라에 온 것처럼 그 모든 게 아주 작고 신기했다.
신발은 또 어찌나 앙증맞은지 그 크기가 내 손바닥 반도 안되었다. 아기 신발을 요리조리 구경하고 있으니 매장 점원이 다가와서 물었다.
"아기 신발을 찾으세요? 한번 골라보세요. 자녀분 거예요? 선물용이에요?"
둘 다 아니라고 해야 하나, 시험관 피검사 합격용 부적이라고 말해야 하나, 이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나는 잠시 망설이고 있었다. 그때 와이프가 천연덕스럽게 점원에게 말했다.
"선물용이에요. 그러니까 예쁜 거로 보여주세요"
"아 그래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남자애예요 여자애예요?"
"음..." 와이프가 잠시 말을 못 잇더니 한참 동안 나를 쳐다봤다. 우리는 고민하다가 파란색 신발을 골라 집으로 돌아왔다. 고것이 아주 조그마한 해도 스니커즈 스타일로 꽤 맵시 있게 생겼다. 한 가지 재미있는 거는 신발 찍찍이 앞에 도드라지게 달린 별 모양의 장식이었다. 보통 알록달록 색깔로 여러 개의 작은 별이 촘촘하게 있는 게 자연스러워 보일 거 같은데 이 디자인은 아주 큼직한 별이 삐죽삐죽한 진짜 별 모양 그대로 딱 한 개만 콱하고 박혀 있었다.
현관 앞에 우리 신발들과 더불어서 별 달린 스니커즈 아기 신발을 가지런히 놓았다.
그것을 한참 동안 보고 있으니 왠지 진짜 우리 집에 내 새끼가 걸음마 연습하다 벗어 놓은 신발인 것 같아 마음이 설레기 시작했다.
그리고 더 한참을 더 보고 있으니, 이제는 군대 휴가 나온 아들 군화 보는 것처럼 든든하기까지 했다.
그 든든함에 한참 동안 배가 불렀다. 담배 한 대 피우러 밖으로 나갔다. 그날따라 봄밤치고는 흔치 않게 하늘에 별들이 많았다. 그렇게 별이 많이 보이는 날 밤의 냄새는 언제나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저 하늘에서 낙성대에 별이 떨어지고 위인이 태어났다는 전설이 생각났다. 그 전설처럼 저 많은 별 중에서 스니커즈 아기 신발에 새겨진 별처럼 딱 하나만 우리한테 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신께 사정이라도 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