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나는 그때까지도 60문제 중 겨우 40번째 답을 OMR카드 마킹 중이었다. 시간이 부족한 사항이었다. 하물며 50번에서 60번까지는 시험지에 답안 체크도 안되어있다. 문제조차 읽어보지도 못했다. 지문이 어려워서 마킹 먼저 하고 다시 풀어볼 생각이었다.
"종료 10초 전"
나는 50번부터 내리 열 문제를 읽지도 못하고 내리찍었다.
시간 안배에 실패한 것이었다. 참담했다.
이런 실수는 모의고사를 포함하여 그동안 해본 적이 없었다.
재수를 시작한 후 성적은 계속 오르고 있었다. 수능 직전 마지막 모의고사 성적은 전국 상위 3% 안에 들었다. 수능 당일, 집 밖을 나서면서 이 마지막 성적표를 한번 더 보니 긴장감은 어디 가고 자신감이 충만하다 못해 넘쳐흘렀는데...
재수라는 시간의 허무함은 '이제 끝이다'라는 후련함으로 대신 채우고 시험에 임했는데...
그런데 진짜 수능에서 이런 사단이 벌어진 것이었다.
왜 갑자기 그런 일이 생기게 된 것인지, 무엇 때문인 것인지 전혀 가늠할 수 없었다. 억울함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절호의 기회가 날아갔다.
두 번 다시 이러한 기회가 나에게는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술이라도 마시면 조금은 괜찮았을까? 하지만 그 당시는 술 마시는 법도 제대로 배우지 못했을 때였다.
나는 한동안 숨 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나의 마지막 수능 시험은 끝났다.
그 후 25년이 지났다. 그런데 이제는 거의 잊히고 있었던 억울한 그 감정을 떠올리게 하는 일이 일어났다. 다시는 오지 않을 것 같은 절호의 기회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이제 다 끝났구나 하는 후련함이 참담함으로 바뀌는 그 순간을 난임 동굴 안에서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
시험관 시술 일곱 번째였다.
해당 차수는 아무런 이벤트 하나 없이 아주 순조로웠다. 무사히 배란되었고, 무사히 채취되었고, 무사히 수정되었고, 무사히 이식되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이제 마지막 착상만 남았다.
이제 임신 성공은 열흘 후 피검사로 최종 결정 나게 되었다.
피검사 D-Day -5일
와이프가 체한 것 같다고 했다. 아랫배가 살살 콕콕 쑤시는 것 같다고 하면서.
"배아 이식하고 소화제 먹어도 되는지 모르겠네?"
"아니 왜?"
"아랫배가 쥐어짜는 것처럼 아파. 체한 것인지 생리통인지 모르겠네"
"와! 그 증상 아주 좋은 거 같은데. 내가 유튜브에서 시험관 시술에 대해 많이 찾아보고 있는데, 그거 착상통이라는 거야. 일단 감이 좋네"
[착상통 : 네이버 지식백과]
착상이란 수정된 배아가 자궁 내벽에 붙어 태아가 모체로부터 산소 및 영양분을 받을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이 시기에 배를 당기는 듯한 또는 쥐어짜는 듯한 복통이 일시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데, 흔히 착상통이라고 한다. 양상은 생리통 봐 비슷하여 실제로 생리통인지, 착상과 관련된 통증인지는 임신 여부를 확인해야 할 수 있다.
피검사 D-Day -4일
와이프가 아침부터 컨디션이 안 좋았다. 몸살기가 있다고 했다.
"아! 나 체한 게 아니라 감기인 것 같아."
"아니 왜? 어디가 아픈데?"
"그냥 몸살기가 있어. 아침에 체온계를 쟤보니 열도 조금 있는 거 같아"
"와! 이거 진짜 착상되는 거 같은데! 그거 아주 좋은 거야. 착상되면 기초 체온이 올라간데. 우와! 이번은 전과는 완전 다른데! 앞으로도 쭉 열나야 하는데!"
[몸이 알리는 임신 징후 : 네이버 지식백과]
- 미열이 나고 감기에 걸린 것 같습니다. 임신을 하면 태반에서 황체 호르몬이 매우 많이 나오는데, 이 호르몬의 작용으로 기초 체온이 올라갑니다.
피검사 D-Day -2일
이번에는 정말인 것 같았다. 임신 증상뿐만 아니라 물리적인 증거가 이를 뒷받침했다.
새벽 5시 30분 출근을 하려고 일어났는데 평소에는 자고 있을 와이프가 화장실에서 안 나오고 있다. 정말 많이 체해서 속이 안 좋은 건가 생각하고 있던 찰나 와이프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면서 화장실을 나왔다. 손에 쥔 뭔가를 나에게 들이민다.
"이거 한번 잘 봐봐! 뭐가 보여?"
와이프가 건네준 건 임신테스트기였다. 시험관 시술 일곱 번째까지 하면서 한 번도 피검사 전에 임신테스트기를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와이프도 뭔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새벽부터 일어나서 검사를 한 것이었다.
"음. 잘 모르겠는데."
"아니 눈 크게 뜨고 다시 봐. 거기 시약선 옆에 한 줄이 더 있으면 임신인 거야. 다시 잘 봐봐"
군대 사격할 때처럼 나는 최대한 눈을 찡그리고 다시 테스트기를 쳐다봤다.
"음. 아! 보인다. 뭔가 있다. 희미하지만 한 줄이 더 있다! 와! 그럼 정말 임신인 거야?"
"음. 아직은 아닌 것 같아. 인터넷에서 보니까 진짜 임신이면 아주 선명하게 보이더라고. 일단 내일 다시 해봐야겠어"
[임신테스트기의 원리 : 네이버 지식백과]
임신진단시약은 임신 유무를 확인하는데 가장 간편한 방법이다. 임신진단시약의 사용 방법을 잘 알고 올바르게 사용한다면 95% 이상의 정확도를 가질 수 있다. 임신진단시약의 결과는 2~3분 사이에 바로 나타나는 장점이 있다. 종료 표시선이 나타난 후 5분~10분이 지난 후 앞의 임신 표시선도 나타나 2줄이 선명히 나타나면 임신, 종료 표시선의 1줄만 선명히 나타나면 임신이 아니다.
피검사 D-Day -1일
또 아침에 와이프가 화장실에서 안 나온다. 나는 기대감으로 발을 둥둥거리고 있었다. 와이프가 임신테스트기를 또 들이내 밀며 중얼거린다.
"어제보다는 진해진 것 같은데, 인터넷에서 본 테스트기처럼 완전 진하지는 않아"
나도 다시 눈을 찡그리고 임신테스트기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아 어제보다 진해졌네, 아 이거 된 것 같은데!"
"아직 몰라. 내일 병원 가니까 내일이 진짜야! 결과 나올 때까지는 이제는 임테기 그만할 거야"
피검사 D-Day 0일
병원 피검사 하는 날 아침이다. 마음 같아서는 나도 같이 병원을 가고 싶었지만 와이프에게 부담을 줄까 봐 평소처럼 출근을 하려고 집을 나선다. 이런저런 생각에 발걸음이 떨어지지가 않는다. 마치 수능시험 보는 날처럼 긴장이 된다.
한쪽 신발을 신다가 다시 벗고 화장대로 달려가 전일 놓아둔 임신 테스트기의 두 줄을 다시 한번 더 쳐다본다. 한 결 마음이 편해진다. 오히려 자신감이 생긴다.
'임신이라는 명확한 물리적 증거가 있는데 두려울게 무엇이더냐'하며 스스로를 독려한다.
오후 5시. 드디어 사무실 책상에 놓아둔 휴대폰이 진동으로 움찔댄다. 덩달아 내 가슴도 요동친다. 와이프 전화이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이제 최대한 담담한 척 목소리를 가다듬고 수신 버튼을 눌렀다.
결과는... 비임신이었다.
피검 수치 8.0이라고 했다. 5 미만은 비임신이고, 최소 10 이상은 임신 가능성이 있어서 2차 피검사를 진행한다고 했다.
이틀 후 2차 피검 12. 그다음 이틀 후 3차 피검 3.
그렇게 끝났다.
시험관 시술 과정 하나하나가 무사했고, 착상통, 기초체온, 하물며 임신 테스트기까지 모든 게 완벽했는데, 마지막 피검에서 허무하게 무너졌다. 무엇이 잘 못 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한동안 그 억울함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냥 내 생에 처음으로 임신 테스트기 두 줄을 본 것에 만족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