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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섬세영 May 01. 2023

머리를 자르고

기왕 자른 김에 기부합니다.

머리를 잘랐다. 좀 많이.


나는 미용실에 잘 가지 않는다. 이번 방문도 재작년 구정 이후 이년 반 만이었다. 이 년이 넘는 시간동안 미용실에 가지 않았으니 내 머리는 등을 넘어 허리까지 오는 상태였다. 이 긴 머리를 고수한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지는 않았다. 중학생 시절 이후 늘 긴 머리를 고수한 것은 그저 취향이었을 뿐이다. 중학생시절 단발령이 떨어져 머리를 자를 때, 미용실에 앉아 세시간을 내리 울었던걸 보면 취향이 아주 확고했던 것이 틀림 없다.




오늘의 미용실 방문은 충동적이었다. 옆지기는 자전거 타러 나가고 나는 모처럼의 휴일을 만끽하기 위해 가벼운 옷차림으로 마실을 나갔다. 집 앞 쇼핑몰을 한 바퀴 돌며 아이쇼핑을 즐기고 인형뽑기도 한판 한 후 집에 돌아가려던 찰나 미용실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머리 안자른지 오래됬네. 좀 자를까?'


발걸음은 순식간에 미용실 앞으로 날 이끌었다. 하지만 미용실에 선뜻 들어가지 못하고 그 앞을 서성였다. 충동과 취향이 갑자기 싸움을 벌여서가 아니다. 휴일의 미용실이 얼마나 바쁜지 알지 못했던 나의 불찰이다. 예약이 꽉 차 있다며 죄송하다는 그 말을 뒤로 하고 나는 다른 미용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자가 칼을 뽑았으면 토마토라도 썰어 먹어야 할 것 아닌가.


그렇게 나는 두 군데의 미용실에서 빠꾸를 더 먹고 나서야 머리를 자를 수 있었다. 오랜만에 앉는 미용실 의자는 여전히 진실된 나의 모습을 비춰줬고 최근 잔뜩 살이 쪄버린 내 모습을 더이상 직면하기 싫어 후다닥 안경을 벗었다. 안경을 벗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어디선가 용기가 샘솟아 올랐다. 살짝 다듬기만 하려던 생각이 점점 과감해지더니 단발로 싹둑 잘라버리는 것에까지 다달았다.


늘 생각하고 곱씹어보고 말해야 한다고 다짐해왔는데, 실패했다. 입에선 벌써 단발로 잘라달라는 말이 튀어 나갔다. 허리 까지 오던 머리를 빗질 해주던 원장님의 손길이 순간 멈칫 하더니, 슬며시 왜 자르냐며 말을 걸어왔다.


"그냥요. 날도 더워지고 기왕 자르는거 팍 잘라버리게요"


원장님은 그러냐며 다시 빗질을 열심히 하더니 입을 뗐다.


"그럼 머리카락 기부 하실래요? 관리도 잘 하셨고 기장도 엄청 길잖아요"



 몇해 전, 머리카락 기부를 시작했다. 길게 기른 머리카락을 몇년에 한번 자르면서 어머나 운동 본부에 기부하는 것이다. 어머나 운동 본부는 어린 암환자를 위한 머리카락 나눔의 준말이다. 하지만 미용실에 갈 때마다 어머나 운동본부에 대해 설명하고 머리를 묶은채 잘라달라고 말하면 이상하다는 눈으로 쳐다보기 일쑤였다. 때문에 이번엔 그냥 말 조차 꺼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미용실 원장님께서 기부를 독려하는 말을 먼저 꺼내주신 것이다. 손님에게 이런 말을 꺼내기 쉽지 않았을텐데 말해줘서 고맙고, 한편으로는 내 자신이 약간은 부끄러워졌다. 좋은 일 하는 것을 부끄러워 한 내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찍어 놓고 보니 무섭다


나는 오늘 원장님 덕분에 예쁜 단발머리도 얻고 기분 좋게 기부도 할 수 있었다. 어쩐지 단골 미용실이 생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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