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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경사 바틀비

- 허먼 멜빌/하비에르 사발라 그림/공진호 옮김

안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출근 사흘 만에 나온 바틀비의 폭탄선언,
평화롭던 월 스트리트에 파란을 일으키다




허먼 멜빌이라고!

어디에서 많이 들었는데. 누구더라. 그래 모비 딕, 흰고래....

일명 백경. 그 소설은 굉장한 모험담의 이야기인데.....

필경사 바틀비라는 소설과는 뭔가 작가의 경향과 일치되지 않는 듯하다.

이런, 작가의 약력을 보니. 이 소설의 탄생은 그의 운명이군. 작가는 여러 가지 밥벌이를 했는데 가게 점원, 은행원, 농장 일꾼, 교사 등을 거쳐 남태평양으로 가는 포경선을 타고 심지어 식인종인 타이비 원주민과 생활을 하는 등. 막장 인생길을 달리고 달리다가 자신의 인생살이를 담은 소설을 쓰기 시작하는데, 줄곧 혹평과 악평만 받을 뿐 실패를 거듭했지.

그의 출세작 모비 딕 마저도 고래 잡기는커녕 송사리도 잡지 못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계속 발생하지.

법률 문학의 대가로 알려진 허먼 멜빌과 필경사 바틀비


심지어 그동안 자신이 쓴 모든 작품이 화재로 소각되는 설상가상의 불운이 거듭되었어.

바로 그때 탄생한 소설이 필경사 바틀비라고 하는군. 

결국 소설이란 작가와 작품의 관계를 봤을 때 작가와 관련된 일체의 모든 사항들이 100% 싱크로율 됐을 가능성이 높지. 

오랜 무명작가의 경제적인 궁핍함. 이를 탈출하기 위해 쓴 일련의 작품들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린 허망감.

쓰고 쓰고 아무리 몸부림쳐도 자신의 존재를....가난한 살림을 일으키지 못했어.

두 아들마저 먼저 떠나 버린 불우한 그의 삶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지.

이런 작가의 인생 굴곡의 변곡점에서 필경사 바틀비를 바라봐야 되는 거지.

꿈보다 해몽을 좋아하고 하찮은 작품에 엄청난 철학적 의미를 갖다 부치는 비평가들의 현학적인 논리는 필요 없어. 이를 테면 이런 것이지.

대표적인 사람이 조르조 아감벤이라는 작자인데 그 유명한 바틀즈의 말인 "안 하는 편을 선택"하겠다는 말을 "존재하거나 행동할 잠재성""존재하지 않거나 행동하지 않을 잠재성"이라고 말을 했지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지. 살아 있고 능력은 있는데 하기 싫고, 죽었는데 능력도 없는....뭐 이런 것인데. 아감벤의 풀이는 너무 어려워. 너무 바틀비를 불가사의한 인물로 풀이하고 있는 셈이지. 별 것도 아닌 인물인데 말이야.


바틀비는 그냥 아무것도 하기 싫은 무기력한 존재에 불과하지. 어쩜 작가의 내면이 투영된 또 하나의 멜빌이지. 연속되는 작품의 실패. 지독한 가난. 가장으로서 책임감. 목숨과 같은 창작품의 소각 사태 등. 이쯤 되면 방아쇠를 당기든가 화장실에서 목을 매달 정도로 극한 삶에 대한 피로감을 느꼈을 것이야.


어떻게 해볼 수 없고, 어떻게 해석할 수 없는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어겠지. 그럴 때 나온 작품이 필경사 바틀비라고 생각해

바틀비는 처음에는 열심히 필사를 하지만(이것은 작가의 창작행위와 유사해) 고용주에게 일갈하잖아 "더 이상 필사하지 않겠다" 완전히 태업을 한 것이지. 아무런 의미를 찾을 수 없었던 것이지. 이미 그는 필경사로 취업하기 전 죽은 상태였어. 그의 전 직장이 우체국이었는데, 그의 임무는 죽은 편지를 소각하는 임무였어.

죽은 편지란 수신인이 받을 수 없는 편지를 말하는 것이지. 바틀비는 죽은 편지를 분류하고 소각하면서 이미 절망과 죽음의 맛보기를 함 셈이지. 이 또한 작가의 삶과 오버랩되지 않아. 허먼 멜빌도 그가 애지중지했던 작품들을 몽땅 태워 먹었잖아. 계속 강조하지만 바틀비는 작가 자신이지..


"아무것도 하지 선택하지 않겠다"라는 의미는 인간의 자유의지나 비루한 삶에 대한 내면적인 저항을 의미하지는 않아. 그냥 모든 게 귀찮은 거야. 삶의 무기력증이지
그림은 하비에르 사발라가 맡았다


월 스트리트는 벽과 벽이 담을 이루는 밀폐된 공간이며 인간의 반복적인 노동이 지루할 정도로 진행되는 삶의 감옥소를 말하지.

변호사 사무실에 고용된 인물들을 봐.

늙은 남자는 오후만 되면 습관적인 신경 증세를 보이고, 젊은 남자는 항상 소화불량 상태이지.

무기력하고 부조리한 삶. 반복되는 노동의 지루함은 별 재미없는 인생들 뿐이지.

그래도 그 두 녀석은 인내할 줄 알고 삶을 살고자 하는 의욕이 있는 인물이지만, 바틀비는 인상 자체가 염라대왕 분위기이지. 창백한 안색, 침묵. 침묵 그 자체인 살아 있는 시체에 불과해.

하루 종일 먹지도 않아. 몇 푼짜리 생강과자를 입 안에 털어 넣을 뿐, 감옥소에서도 고용자가 제공한 사식을 거부하지. 결국 그는 굶어서 죽어. 먹지는 않는 것도 그의 선택인 게야.

바틀비의 신상에 대한 일언반구도 찾을 수가 없어. 그의 고향이 어디인지. 어디서 살았는지. 어떤 사랑의 추억이 있는지. 부모는 누구인지. 아무런 설명이 없지. 익명의 사내인 셈이야.


그 스스로 사회의 쓸모없는 잉여의 인간이라 생각하는지 인간적인 교류는 물론 돈에 대한 욕심도 없어...유령 같은 존재지. 


고용주도 대단해. 바틀비 같은 인물을 곧바로 해고하지 못하고 때론 동정과 연민으로 때로는 부려먹기 위해. 고용주는 주저주저하지.

끝내 그를 해고하지만 바틀비에 대한 연민은 감옥소까지 이어지고 그의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하지.

그의 역할은 뭘까? 아마도 바틀비의 무기력과 혼동된 정신세계를 보여 주기 위한 상대 역할이 아니였을까? 

이상한 것은 바틀비를 읽을수록 그가 나인 것처럼 느껴졌어.

우리도 때론 삶이 무료할 때가 있잖아, 아무것도 하기 싫고. 고용주에게 과감히 자신의 의견을 말하지 못하고 꼬랑지를 내릴 때 있잖아. 바틀비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도리어 그 어느 것도 선택하지 않을 수 있었을 거야. 어쩜 자유인일 수 도 있지. 그러나 전반적인 정서는 불쌍하다야. 불쌍. 왠지 모를 정서적 유대감.

그래서 마지막 구절이 "아 바틀비여 인류여"라고 한 걸까.

우리 모두에 대한 이야기 말이야. 우리도 사방이 막힌 콘크리이트 건물 안에서 반복적인 일을 하며 그 어떤 일탈도 꿈꾸지 못하는 살아있는 유령들이 아닐까? 내일이라도 나도 "차라리 선택하지 않겠다"라고 말할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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