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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사랑하는 것

- 함정임


때로 엉뚱한 곳에 뜻밖의 삶이 깃들기도 했다.





그 옛날 나의 집이 있었다.

모란이 핀 양옥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한동네를 이룬 진주 법원 뒤편에 

나의 오래된 옛집이 있었다.


파란 대문에서 왼쪽으로 몇 걸음을 옮기면 멀리 대나무 숲을 안고 휘돌아 흐르는 

남강이 보이고

굽이굽이 이어져 있는 골목길을 빠져나와 흙길을 몇 번 밟고 올라서면 선학산이 

허리를 굽히고 

자신의 정수리를 내밀고 있었다.


푸른 잔디가 돋아난 정원에는

아버지가 좋아한

붉은 동백꽃이 도톰하게 피어오르고 누이의 피아노 소리는 

어머니의 고등어조림 내음과 함께 

이층 철쭉나무에서 파도처럼 부서지고 있었다.


그 집은

우리 가족이 살았던 4번째 집.


진주 성 아래, 내 생애 최초의 영화인 '십계'를 아비와 싸운 어미와 함께 보았던

제일극장 그 앞

어미는 문방구를 하며 삼립호빵을 팔았던  단층집. 내 기억의 첫 번째 집.


뽕나무 밭 사이 꿀빵을 사들고 동네 어린 소녀와 소풍을 즐겼던 

진주 농전,  그 학교 탱자나무 울타리 옆.

시멘트 블록으로 쌓아 올린 회색의 슬레이트 집.


그리고 

시커먼 석탄이 잔뜩 쌓인 연탄공장을 문 앞에 두고 나는 검은 길을 따라 

아버지의 술 심부름을 다녔고 은행나무가 있던 마당의 맞은편에는

외팔이 사내와 벙어리 여자가

함께 살았던 그 옆 방.

내가 은근히 좋아했던 ‘미화’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 아이가 살았다.


내가 살았던 4번째 집.

이제 다시

우리 가족이 되돌아가지 못할 

4번째 집, 이층 양옥집.



황해도 해주에서 경기도 양주로 양주에서 의정부로 의정부에서 

서울 수유리의 파란 대문. 

감나무가 있던 이층 집의 늙은 부부.

저자 함정임과 그녀의 소설집


함정임의 소설집 ‘사랑을 사랑하는 것’은 이렇게 공간으로 시작되며 그것에 대한 10개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소설적 공간은 작가가 공간 여행을 하듯 부산 해운대와 영도로 남하하여

미국의 디트로이드와 프랑스로 넘어가면서

끊임없는 이야기의 거미줄을 

지면에 쏟아낸다.


호모 비아토르, 여행하는 인간 함정임은 올해 등단 30년을 맞이한 ‘여행과 소설에 중독된 작가’라 불린다.
10편 중 7편이 특정 공간이 소설의 제목으로 달 정도로 ‘공간성이 뛰어난 소설’이다.


소설 속 공간 속에서

등장인물들은 파리와 몽소로, 도쿄와 교토, 모스크바와 이르쿠츠크 등의 꼬리표를 달고 

여기저기 불쑥 튀어나와 소설적 배경을 확장한다.


첫 문단과 마지막 문단이 조응되는 수미상관식 배치는 

안정감 있는 소설적 구조를 완성하면서 한 편의 장편 서사시를 읽은 느낌이다.


무엇보다 ‘애도의 문학’이라고 불릴 정도로

작가의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스페인 여행’ 편에서 잘 나타내고 있다.

스페인 여행은 단 한 줄도 나오지 않는 이 작품에서 프랑스 파리를 배경으로 모친의 죽음에 대한 극도의 절제된 슬픔을 보여줌으로써 우리를 더욱 슬프게 만드는 비극성을 담고 있다.


그녀는 작가의 말에서

‘삶과 소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오롯이 한 세상이다’며

‘나는 다만,

빌려 썼을 뿐’이라는 그녀의 작품은 참 아름답다.


#스페인여행과 영도편은 수작

#자전거도둑, 김소진의 전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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