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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눈물을 믿지마

- 김이정


어떤 교련 선생이 생각난다. 

180 센티에 이르는 큰 키와 깡마른 몸매, 군용 모자와 잠바를 입고 그는 항상 짙은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다른 선생님과도 별로 어울리지 않았고 늘 혼자 넓은 운동장을 가로질러 다녔다. 

그는 항상 말이 없었고 말을 하더라도 수업 시간에 꼭 필요한 몇 마디만 했다. 나머지는 침묵이었다. 

우리는 땡볕이 내리쬐는 운동장에서 목총을 들고 길게 찔러, 막아, 돌려 쳐 등 총검술 16개 동작을 배웠고  앞으로 가, 좌향 앞으로 가, 우향 앞으로 가 등 제식훈련을 그에게서 받았다. 

교련 선생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힘이 있었고 그가 움직이는 동작 하나하나에는 절도가 있었다. 

교련 시간이면 일상적으로 자행 되던 주먹질이나 조인트 까기, 원산폭격 등은 그에게는 없었다. 

어쩌면 그에게 폭력은 아예 필요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몸 전체에서 풍겨 나오는 아우라는 공포 그 자체였고 선글라스 밑에 숨어 있는 칼날 같은 눈빛이 두려웠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말에 고분고분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우리는 졸업할 때까지 단 한 번도 그의 눈동자를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그 당시 소문에 의하면 교련 선생의 눈은  무서운 살기를 띄고 있기 때문에 함부로 쳐다 보면 안된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그리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몇 년 후 동문들로부터 교련 선생의 소식을 들었다.  

그는 놀랍게도 자살을 했다는 것이다. 그는 베트남전에 참전한 군인이었다.  


나는 그의 소식을 듣고 여러 생각이 들었다. 그는 왜 젊은 날 위험을 무릅쓰고 베트남으로 갔을까?  

죽음과 공포의 땅에서 그가 수행한 임무는 무엇이었고 그는 무엇을 보았을까? 

무엇보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 왜 그는 죽음을 선택해야 만 했을까? 

그도 ‘하미 연꽃’에 등장하는 서 하사처럼  ‘연탄가스가 새지 않는 방한 칸에 대한 욕심’때문이었을까? 나의 교련 선생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면 서 하사는 48년 동안 정신 병동에 갇혀 있다가 죽었다. 


나는 김이정의 세 번째 소설집인 ‘네 눈물을 믿지마’에 수록된 ‘하미 연꽃’과 ‘퐁니’를 읽으며 베트남 전에 참전했던 교련 선생을 떠올렸다. 이 두 단편은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군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을 다루고 있다. 

소설 속 ‘빵’과 ‘달걀’은 서로에 대한 호감과 평화의 선물이었지만 결국 돌아온 것은 총탄 세례와 집단 학살뿐이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마주한다면 사람의 성정이 통하지만 인간이 전쟁을 만나면 악마가 되고 승냥이가 되는 법이다. 거대한 전쟁 이데올로기에 내몰린 인간들의 속성이란 야비한 폭력뿐이다. 

김이정 작가의 세 번재 소설집 '네 눈물을 믿지마'


소설가 김이정은 과거와 현재라는 시간의 간격을 입체적으로 설정하여 학살의 죄와 불완전한 용서가 어긋나는 현실을 고발하고 있다. ‘노란 매화꽃’과 ‘개미’가 반복 변주되는 특정 소재의 활용은 민간인 학살이라는 공통 코드를 형성하여 전쟁의 참혹함과 폭력의 비극성을 드러낸다. 특히 피해자와 가해자, 그리고 제삼자의 시점에서 동일한 사건을 서술하는 다초점 기법은 서사의 겹을 더욱 두텁게 한다. 


또한 민간인 학살의 상황을 과장하지 않은 사실적 묘사를 통해 한 편의 다큐 영상을 보는 듯 깊고 깊은 현장감을 고통스럽게 그려내고 있다. 이 두 소설에서 보여준 과거와 현재를 병치시키는 작가 특유의 서사 방식은 호모 비아토르, 즉 여행하는 인간 유형을 등장시켜 몰락한 주인공이 존재의 근원을 찾아가는 다양한 이야기들로 확장된다. 


인도의 바라나시, 포르투갈의 리스본, 스페인의 케르니카, 영국 런던의 외곽 도시, 다시 인도 마이소르 등을 여행하며 경제적 파산과 정신적 파산으로 무너져 내린 자신을 다시 세우기 위한 방황과 방랑의 여정을 눈물겹게 보여 준다. 항상 여행은 충동적으로 결정되었고 주인공은 변두리와 황무지 그리고 비루한 공간을 찾아다니며 존재의 근원과 의미를 탐색한다. 삶과 죽음이 가벼운 인도 바라나시에서 무겁게 살아온 존재의 허울을 벗고 생의 의지를 다지는 장면은 무너진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을 한다. “자신을 잃은 삶이야말로 가장 부도덕한지도 몰라 어떻게든 나를 회복하기 위해 애쓸 거야”라고 말이다.  절대적 운명 앞에 어찌할 수 없었던 인간의 비극을 다룬 ‘죄 없는 사람들의 도시’는 리스본 대지진의 참사와 급성 백혈병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한 인간의 참혹한 모습을 대칭구조로 배치하였다. 작가는 ‘왜 지은 죄 없는 내게 이런 가혹한 벌을 내리는가’라는 절규를 통해 ‘신에게 배반당한 분노’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죄 없는 사람들의 도시’의 대칭구조는 ‘노 파사란’ 편으로 이어지며 스페인 게르니카의 폭격과 남편의 죽음을 배치하여 해체된 자아의 절망감을 극도로 표현하고 있다. 


그 절망의 끝에서 만난 게르니카 여인의 위로는 슬픔의 연대, 공감의 연대가 때로는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작은 힘이라는 사실을 깨우친다. 결국 저마다의 슬픔을 안고 사는 우리들 모두 ‘울 곳이 필요한 것’이다.  

소설가 김이정은 끝없는 공간이동을 통해 어찌해 볼 수 없는 생의 운명과 거기에서 달아날수록 꾸역꾸역 좇아오는 불행을 담담히 서술하고 있는데 ‘압생트를 좋아하는 여자’라는 단편도 그러하다. 


작품 전반에 흐르는 경제적 파산과 이혼, 파괴된 정체성,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은 참담하고 절망스럽지만 먼 국경의 밖에서 생의 의지를 되찾고자 하는 분투는 눈물겹고 의지적이다. 한편 작가는 그동안 유사한 형식과 주제에서 조금 벗어난 블랙 코미디 같은 ‘믿지마, 네 눈물은 누군가의 투신일지도 몰라’라는 작품을 통해 독자들의 폭소를 연신 자아내는 해학적 문장도 선보인다.  그야말로 자유자재로 문장과 서사를 다루는 연금술사적인 마법을 갖고 있는 작가이다. 


또한 퀴어 소설의 유형인 ‘붉은 길’을 통해 위험한 인도에서 길을 잃은 여자의 심리를 밀도 있게 그려내며 여자가 여자를 사랑했고 여자를 그리워했던 마음을 서정적인 문체로 그려내고 있다. 소설가 김이정의 소설집 ‘네 눈물을 믿지 마’에 수록된 8편이 각기 다른 이야기들을 품고 있지만 결국 아슬아슬한 시곗바늘 끝에 매달려 살고 있는 사람의 시간에 대해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녀의 소설은 사람을 향해 있다.  

작가의 말에서 드러났듯이 더할 수 없이 연약하고 비천하고 잔인하지만 또한 한없이 강하고 고귀하고 아름다운 존재 역시 인간이다고 말한다.  


소설가 김이정의 작품이 처절하고 위태로워 보이지만 아름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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