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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의 자세

- 김유담

세신사 엄마와 무용을 전공하는 딸, 그리고 여탕을 드나드는 고단한 여자들… 
‘금남의 구역’에서 벌어지는 이 시대 여자들의 내밀한 이야기 




왜 그렇게 그때는 그곳을 궁금해하며 그것을 보고 싶어서 미치도록 환장했을까?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지만 어쩌면 내 몸과 다른 또 다른 몸에 대한 불타 오르던 욕망 같은 것 아니었을까? 

내 욕망의 배출구는 낙원탕이라는 동네 목욕탕이었고 그곳에서 아슬아슬하게 엿보는 여탕의 탈의실은 내 욕망의 낙원이었다. 나는 낙원으로 가는 탕을 가기 위해 한 달을 참고 또 참고 기다렸다.  


내가 매표소에서 돈을 낼 때 태양과 달이 충돌하는 확률로 카운터 아줌마의 등 허리 쪽으로 살짝 탈의실 가림막이 열릴 때 그 좁은 틈새로 허옇고 굵은 허벅지가 쓰윽 지나가고 늙은 할미의 주름진 뱃살도 보이곤 했다. 그 짧은 순간 어린 꼬마 녀석은 별세계를 본 듯 정신줄을 놓아버리고 남탕 출입구도 찾지 못한 채 두리번거렸다. 


김유담의 ‘이완의 자세’는 여탕에서 소위 때밀이로 일하는 엄마와 그 딸의 인생유전을 밝고 가벼운 문체로 다루며 삶이란 누구의 꿈대로 사는 경직된 자세가 아니라 자기 만의 방식으로 여유롭게 살아가는 이완된 자세를 가질 때 일이 슬슬 잘 풀린다는 묵직한 주제를 던져주는 소설이다. 
소설 이완의 자세, 그리고 저자 김유담


벌거벗은 육신들이 자신의 묵은 때를 벗겨내는 대중목욕탕은 인간이 인간을 바라보는 가장 원시적인 공간이며 상하귀천을 따지지 않는 만민평등의 장소이다.  그러나 알몸에도 계급장이 새겨져 있고 차별과 무시가 때때로 일어나는 밀폐의 공간이기도 하다. 

특히 돈을 매개로 서비스를 사고파는 매매의 관계에서는 갑과 을이라는 주종관계가 더욱 노골화된다. 

24시 만수 불가마 사우나의 선녀탕에서 때밀이로 일하는 ‘나’의 엄마는 이름이 있지만 이름이 없다. 모든 손님들은 엄마 오혜자를 여탕, 여탕으로 부르고 그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 목욕침대에서 사람의 때를 벗겨내는 엄마의 밥벌이는 고단하고 비루한 작업이다. 

영화 행복 목욕탕의 한 장면

엄마는 지하 1층에서 근 20년 동안 최고급 속옷인 빨간 팬티와 브래지어를 입고 지하 밑바닥 막장에서 오직 ‘나’를 희망의 등대로 삼아 생의 고단함을 견디어 왔다. 한 때 피부 관리실을 운영하며 빨간 스포츠카를 신나게 몰고 다녔던 나의 엄마는 다단계 아저씨에게 사기를 당하고 결국 이태리 타월을 손에 쥔 채 이곳 선녀탕으로 주저앉았다. 하지만 엄마는 삶의 막바지에서 그 누구를 원망하거나 박명한 팔자를 탓하지 않고 매일 아침 냉탕에서 수영을 하며 경건한 마음으로 삶의 의식을 치른다. 


추락한 삶을 받아들이고 하루를 열심히 살아 가고자 하는 이 엄마의 거룩한 모습은 아름답고 눈물겹다. 

그래서 엄마는 도둑년 돈이든 갈보년 돈이든 들어오기만 해라며 악착같이 돈을 모으고 자신의 딸에게 인생의 모든 것을 건다. ‘나’는 엄마의 모든 것이다. 유명 사립대 무용과에 합격한 ‘나’의 영광은 엄마의 훈장이자 축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는 때밀이의 딸에 불과했다. 사람들은 여전히 그렇게 ‘나’를 보았다. 


비록 엄마의 때 민 돈으로 대학 무용과에 다녔지만 춤추는 자의 영광은 다른 무용수의 차지였고 ‘나’는 하찮은 존재로 전락했다. 내 몸은 경직되었고 더 이상 중력을 이겨내고 높이 날을 수 없었다. 가벼운 자 만이 높이 날아 춤을 출 수 있는 것이다. 그 옛날 엄마의 추락처럼 갈 곳 없는 ‘나’는 여중, 여고, 여대를 거쳐 다시 여탕으로 돌아와 지친 엄마의 몸을 본다. 그리고 온탕으로 들어가 따듯한 물결 속에서 꿈 하나로 달려온 자신의 경직된 몸을 달래며 고요히 생각한다. 


누구의 딸도 대단한 무용가도 아닌 아무것도 아닌 채로 살고 싶다고 생각하다가 그러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이다. 그것이 긴 세상을 살아가는 이완의 자세이고 지혜이다. 


작가 김유담은 사랑손님과 어머니에 등장하는 옥희의 목소리로 엄마와 여탕의 자지구레한 일상사와 에피소드를 생기발랄하게 들려주고 때로는 꿈이 사라진 청춘들의 불확실한 미래와 답답한 현실을 푸념 어린 여대생의 목소리로 들려주기도 한다. 무엇보다 이 소설의 최고 장점은 너무 재미있다는 것이다. 


동네 고전무용 학원 원장의 맛깔난 경상도 사투리는 읽기만 해도 웃음이 툭툭 튀어나오고 만수 불가마 사우나의 아들 만수의 좌충우돌식 입담도 꿈이 좌절된 슬픔들을 환하게 만들어 주는 반딧불과 같은 역할을 한다. 

여탕에서 이뤄지는 다양한 인간군상들의 민낯과 남의 몸을 씻어 때돈을 벌고 딸의 성공을 위해 억척스럽게 일하는 엄마의 모습은 과잉된 감정처리 없이 담담하게 서술돼 있다. 그리고 꿈을 좇아 처절하게 몸부림쳤지만 실패와 좌절을 겪은 어린 청춘들의 슬픔과 절망을 잘 드러내고 있다. 

누구나 그런 경험이 있듯이 온탕 속에 온몸을 담그고 있으면 굳은 근육과 경직된 기분이 점점 풀리면서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기운이 물 바닥에서 올라올 때가 있다.  그런 이완된 자세로 살아가면 술술 일이 잘 풀릴 것이다. 김유담의 소설은 딱 그런 기분을 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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