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오로라 상회의 집사들

- 이경란


분노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서로를 보듬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일




‘오로라’ 글자에서 가운데 소리,  모음의 일부분이 떨어져 나가 무엇에 대한 성냄인지 으르렁으르렁거리는 ‘으르라 상회’ 로 바뀐 그곳에서 젊은이와 아저씨들이 호가든 캔 맥주를 마시며 흰소리 검은소리를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이윽고 4인 결사체로 서울 강남의 39년 된 25평 월세 아파트로 입주하게 됩니다. 


길고양이 유로와 실업 수당 끝물을 쪽쪽 빨아먹고 사는 실업자, 비싼 학원비만 축내며 매일매일 공치고 있는 공시생, 편의점과 당구장 알바를 왔다리갔다리하며 한 푼 두 푼 알차게 모으며 복학을 준비 중인 고학생. 이들 청년들의 셋방살이에 늙수그레한 중년의 남자가 더부살이로 낑기며 이상야릇한 동거생활이 시작됩니다.  


바로 이경란 작가의 장편소설 ‘오로라 상회의 집사들’ 의 시작인 셈입니다.


인생사 어느 부분에서 변방으로 밀려 나온 4명의 고전 분투기를 담은 이 소설은 2022년을 살아가는 우리 청춘들의 일그러진 자화상이며 먼 인생길을 달려 왔지만 막상 뒤돌아 보니 빈 껍데기로 남은 한 중년남자의 방황기이기도 합니다.


작년에 발표한 ‘빨간 치마를 입은 아이’ 단편집 7번째 작품 ‘요일 팬티 7종 세트’편에서 보여준 웃다가 자빠질 수밖에 없는 희극적 연출과 순발력 만점의 입담과 재치를 한층 더 업그레이드하여 재기 발랄한 이경란표 코믹 소설로 돌아왔습니다. 짧게 짧게 문장을 쳐 나가며 앞으로 쭉 끌고가는 서사의 힘은 실로 대단하며 술술 읽히는 가독성은 으뜸입니다.

그렇다고 이 소설이 익살과 재담만 이어져 있는 가벼운 이야기로 보았으면 안 됩니다. 작가는 우리 시대가 안고 있는 청년과 중년의 문제, 노동의 문제, 세대 간의 갈등 문제를 포착하며 웃음 뒤편에 도사린 슬픔의 사금파리를 숨겨 놓았습니다. 


비록 그 문제의 원인을 깊이 있게 다루며 해결방안 또한 설득력 있게 제시하지는 못하지만 등장인물 4명이 102동 오로라 아파트에서 엮어 내는 소소한 일상들을 가만히 엿보고 있으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겨드랑이 밑에서 날개가 돋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오로라가 라틴어로 ‘여명을 닮은 북녘의 빛’으로 불리듯 어두운 방황을 끝내고 밝아오는 새벽빛을 향해 걸어가는 그들의 인생행로를 보고 있으면 그래 한 번 해보자라는 작은 용기도 생깁니다.


교환가치와 무한 경쟁을 추구하는 불평등한 자본의 시스템 속에서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삼삼오오 마음이 맞고 뜻이 통하는 사람끼리 우애와 환대의 공동체를 만들어 서로를 사랑하고 격려하며 살아가는 길 뿐인지도 모릅니다.


오로라 아파트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사랑과 환대의 공간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위대한 일들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