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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행

어금니처럼 솟은 산에서 그녀는 걸음을 걷기 시작합니다. 복사꽃 흐드러진 봄의 정원을 지나, 세찬 여름비가 물기둥처럼 쏟아지는 벌판을 가로지르고, 단풍 든 숲을 통과했을 무렵 하늘엔 별가루 같은 눈이 내립니다.


해마다 상수리나무에 깃든 사슴벌레들은 호각 같은 소리로 그녀의 길을 이끌고, 구름 밖의 달과 해는 그녀의 정수리 위에서 은은히 빛나며 가야될 곳을 가리킵니다. 그녀는 오래전, 바닷물이 흰산으로 일어났던 세계의 법칙을 따라, 마음이 이끄는대로 걷고 또 걸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서 받았던 고통과 근심은 ‘책으로 만든 방’에 가까워질수록 멀어져 갑니다.


그녀가 백석고개를 넘었을 때, 옛 절터가 있던 마을 언덕에 키 큰 소나무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녀는 어금니산에서 가져온 물기 머금은 고추와 상치를 살피며, 기쁜 마음으로 나무문을 엽니다. 이제 곧 그녀의 여행이 시작됩니다.


높은 산, 차가운 바람이 지나던 산맥에서 걸어 내려온 나무들은 종이가 되고 책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환한 빛이 감도는 책들의 방에서 책을 조심스레 펼칩니다. 그 순간, 시공간이 뭉개지며 토끼굴처럼 열린 구멍 속으로 그녀는 빨려 들어갑니다.


남미의 마콘도. 그곳은 4년 11개월 2일 동안 비가 내리는 마을입니다. 진흙과 대나무로 엮은 집들 사이로 안개와 햇살이 뱀처럼 구불거리며 흐릅니다. 강과 늪을 따라 벌거벗은 아이들이 뛰놀고, 황금빛 나비들이 너울거리듯 날아다닙니다. 그녀는, 참 아름다운 마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마을은 조금씩 변합니다. 원시에서 문명으로, 평화에서 전쟁으로. 그녀는 밤나무에 스스로를 묶고 죽은 ‘부엔디아’를 바라보며, 인간의 백년이란 생성과 번영, 그리고 몰락의 시간이자 고독의 시간임을 깨닫습니다. 마치 마을 전체가, ‘단 한 장의 양피지 위에서 돌돌 말려 사라지는 것’을 지켜본 그녀는 곧 남쪽에서 북쪽으로, 한순간에 이동합니다.


멀리서 검푸른 롱아일랜드 사운드 바다가 보입니다. 공중에 머문 채, 그녀는 해변을 내려다봅니다. ‘웨스트 에그’에선 불꽃이 꼬리연처럼 피어나고, 나무 사이로 뉴욕풍의 재즈음악이 흐릅니다.


프랑스 노르망디풍 호텔 같은 저택에선 ‘위대한 개츠비’가 맞은편 ‘이스트 에그’에 사는 데이지의 집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그녀가 바라봅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바다가 있습니다. 황금빛 허세와 가면으로도 결코 넘을 수 없는, 신분의 벽 같은 바다. 그녀는,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을 위해 끝없는 욕망을 펼친 개츠비의 위대함을 생각합니다.


다시 책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소나무 사이를 거닙니다. 어디선가 고양이의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소나무가 품은 햇살 한 조각이 책방을 환히 비춥니다. 그녀는 새로운 여행지를 찾아 책의 허리를 조심스레 넘깁니다.


뜨거운 태양과 다섯 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던 이방인의 도시 알제. 국경의 긴 터널을 지나 펼쳐지는 니가타현의 설국. 그리스인 조르바가 춤췄던 크레타의 바닷가.

그리고 죽은 소년의 목소리를 통해 학살과 기억의 책임을 묻는 우리들의 빛고을 광주……


그녀는 조용히 책방 안에 머물며 세계와 사람들을 만납니다. 종이 위에 새겨진 활자들이 풍경이 되고, 인물이 되어 그녀 앞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행이 시작되는 곳, 바로 동네책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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