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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모르는 시베리아 이야기

- 일생에  단 한번 그곳에 머물 수 있다면


러시아 전문가의 시베리아 이야기. 20년에 걸친 생생한 체험담을 담다




6월 한 달 내내 

아침부터 저녁까지 장돌뱅이 마냥 이리저리 떠돌며 강의 품팔이를 했다. 

아침 눈을 뜨자마자 곧장 학원으로 달려가 잠 깨지 못한 성대를 뜨거운 커피로 깨우며 횡설수설, 거의 반자동 수준의 정제되지 못한 언어들을 쏟아부었다. 

어린 소년에서 늙은 할미까지. 남녀노소 불문하고 무수한 말을 쏟아냈더니 늦은 저녁 잠자리까지 메아리 되어 울리더라. 


일찍이 ‘읽고, 쓰고, 떠나고’  등 ‘3GO’ 인생이었는데 ‘벌고’ 하나가  추가되면서 돈벌이에 혈안이 되었다. 


하지만 삶의 중심과 방향은 중요한 것. 

생성과 소멸의 틈새에 놓인 시간을 적절히 활용하여 띄엄띄엄 책을 읽고 글을 썼다. 여유 있는 시간보다 바쁜 일상을 쪼갠 자투리 시간이 역설적이게도 독서에 도움이 되었다.


때론 봄이면 벚꽃 만발한 불당천 나무 그늘 아래에서 신발을 벗은 채 편안한 자세로 읽었고 신방동 후미진 원룸촌 골목길에 차를 세우고 동네 놀이터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읽었다. 

6월 하늘에선 햇빛이 쨍쨍, 청포도가 익어가는  날에도 읽었고 무수한 폭우가 자동차의 천장을 난사할 때도 나는 고요히 책장을 넘겼다. 읽는다는 행위는 한 세계에 오롯이 집중하여 깊이 있게 탐색하는 일이다.

나는 초여름의 입구에서 동토의 땅이라고 하지만 엄연히 사계절이 존재하는 시베리아를 읽었다.


박대일 작가의 ‘시베리안 나이트’ 

그는 20년 이상 시베리아에 거주하며 블라디보스토크, 우수리스크, 하바톱스크, 이르쿠츠크, 바이칼 등 숨겨진 비밀의 풍경을 찾아 길을 나섰다.  지리학적으로 시베리아란 '우랄산맥 동쪽부터 태평양 연안에 이르는 지역'을 말한다. 살아생전 이곳을 여행하지 않는다면 온전히 이 세계를 안다고 할 수 없으며 지구별의 인간으로서 자격없을 것이다.

이 책은 기존 주마간산식 시베리아 여행담과 차원이 완전히 다르다. 

자작나무 숲(출처: 이정식 갤러리)


저자는 우연히 떠난 시베리아 여행을 시작으로 이르쿠츠크에 정착한 후 20년 동안 현지인들과 동거 동숙하며 생활해 왔다. 그야말로 시베리아 전문가인 셈이다. 짧은 여행으로는 알 수 없는 시베리아의 깊고 넓은 이야기들을 350페이지에 담았다.

겨울만 있을 듯한 시베리아의 아름다운 사계절을 담았고 유독 꽃과 애완동물, 책을 사랑하는 현지인들의 소소한 일상생활도 잘 포착하고 있다. 개방과 함께 부패와 매춘, 도둑질 등 자본주의 병폐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고 있지만 예전부터 이어져온 순박한 정과 미덕은 여전하다. 작가가 보고 듣고 느낀 삼박자의 견문들은 별도의 미사여구 없이 담백하게 서술돼 있어 그 자체가 훌륭한 스토리가 되고 있다.


이렇게 다양한 시베리아의 문화와 생활 풍습들의 소개 외에 무수한 사진들도 함께 실고 있어 시원시원하게 그 일대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끝없는 자작나무 숲길과 일망무제의 눈 쌓인 허연 벌판. 태평양 연안에서 유럽으로 달리는 횡단 열차의 질주와 영원의 안식처인 ‘바이칼 호수’의 풍광을 담았다. 무엇보다 시베리안들의 일상사를 별다른 연출 없이 다큐식으로 촬영하여 사실감을 드높였다.

영혼의 안식처 바이칼 호수(사진 출처: BK 투어 서비스)



하지만 시베리아는 1825년 12월 러시아에서 최초로 근대적 혁명을 시도했던
 사람들의 유배지였다.


1825년 12월 러시아 최초의 근대적 혁명, 데카리스트


저자는 12월 혁명 즉 데카브리스트를 소개하고 있다.

1825년 황제 안렉산드로 1세가 죽고 니콜라스 1세가 즉위하자 귀족 출신의 청년 군인과 지식인들은 그해 12월 페테르부르크에서 혁명을 일으켰다.

입헌 군주제와 농노제 폐지 등 자유와 평등을 주장했던 그들의 혁명은 실패로 끝났고 총 121명 중 31명이 감옥에 갇히고 나머지는 시베리아로 유배를 보냈다.

혹독한 유형지는 데카브리스트들을 더욱 강철처럼 강하게 만들었다. 굽히지 않는 혁명에 대한 신념, 서로에 대한 믿음, 승리의 낙관주의로 무장한 그들은 시베리아를 새로운 땅으로 일구어 나갔다. 혁명가의 품위를 잃지 않았던 그들은 시베리아를 삶의 공동체 공간으로 만들어 갔던 것이다.

서로가 가진 재능과 기술을 교육과 공유의 방식으로 전체를 위해 아낌없이 내놓고 자급자족의 생활경제를 실현하기 위해 협동조합을 건설하고 공동 생산지를 일구었다. 과학과 기술, 문화와 예술을 자력갱생 방식으로 발전시켜 나갔고 자녀와 지역 교육을 위한 사립학교를 세워 무지몽매한 시베리아인들을 각성시켜 나갔다.

데카브리스트 볼콘스키 박물관(사진 출처: 네이버 블로그)


데카브리스트는 톨스토이와 푸쉬킨, 그리고 도스프예프스키 등 대문호들의 문학정신과 창작의 밑거름이 됐다.

시베리아는 '전쟁과 평화', '죄와 벌' 등 위대한 작품의 탄생지가 되었다.

무엇보다 청년 혁명가들을 찾아 상페테르부르크에서 혈혈단신으로 험난한 길을 걸어 머나먼 시베리아 유배지까지 찾아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헌신적으로 뒷바라지한 러시아 여인들의 사랑은 경외감 마저 든다.



#유배지의 땅이자 혁명의 땅이었던 시베리아.

일찍이 블라디보스토크는 조상 대대로 이어져 온 삶의 터전을 등지고 남부여대의 고난을 이겨낸 한인들의 새로운 보금자리였으며 독립 운동가들의 주요 활동지였다.

'서울 스카야 거리 2번지'라고 명명된 신한촌의 흔적은 나라 잃은 조선민족의 애환을 담고 있으며 고려인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할 때 기차를 탔던 라즈돌노예역은 고려인의 한을 담고 있다.

이르쿠츠크 카톨릭 교회(사진 출처: 블로그)


또한 우수리스크는 연해주 일대의  조선 독립 투쟁의 주요 거점이었다. 함경도 경원 태생의 최재형 선생은 안중근 의사의 거사를 돕고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 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한 이상설 선생의 유허비가 우수리스크에 서 있다. 한국 최초의 한인 여성 사회주의자였던 김 알렉산드라의 고혼이 하바롭스크에서 떠돌고 있다. 이렇게 시베리아 일대는 조선인들의 강제 이주의 한과 조선 독립 투쟁의 흔적들이 여기저기 남아 있다.

 

천 개의 이야기를 담은 아라비안 나이트처럼 시베리아 나이트는 그에 버금가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우리를 초대한다. 항상 좋은 책은 우리를 유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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