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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박은정 옮김

다성악 같은 글쓰기로 우리 시대의 고통과 용기를 담아낸 기념비적 문학




전쟁의 역사는 남자의 이야기이다. 

영어의 History는 남성 중심의 역사를 말한다.

영웅은 항상 남성이며 무용담은 수컷들의 독차지이다. 

전쟁의 추악함은 은폐되고 승리와 영광의 화려함만 드러난다. 그 화려함의 중심에 남자가 있고 여자는 항상 전쟁의 뒤편에서 보조자 혹은 피해자로 남아 있다. 


이 책은 철저히 여성의 입장에서 바라본 전쟁의 역사서이다. 여성의 시각이란 전선에서 물러난 후방에서 바라본 관찰자의 입장이 아니다. 철저하게 전쟁의 참여자로서 바라본 체험적인 진실의 증언들이다. 
2015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여성들은 소총 저격수, 탱크 운전병, 전투기 조종사, 위생병, 전화 교환수, 빨치산, 포병부대 등 남자와 동등한 역할을 수행하며 독일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 10대 소녀에 불과한 처녀 병사들의 전쟁 체험담은 고통스럽고 슬픈 이야기들이다. 긴 머리는 남자 병사들처럼 짧게 자르고 블라우스 대신 남성 군복과 남성 속옷을 입은 그녀들. 거울과 화장품 대신 소총을 들고 비행기와 탱크를 몰았다. 

생리대가 없어 길바닥에 빨간 피를 흘리며 행군해야 했고 풍찬노숙을 하며 전투를 치렀다. 여자라는 정체성을 스스로 포기하고 조국을 구하고자 하는 그녀들의 신념은 감동스럽다. 하지만 이 책은 여성들의 영웅담을 담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여성의 시선으로 바라본 전쟁의 참혹함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 어떤 수사나 상징도 없이 눈으로 보고 귀로 직접 들은 이야기가 생생하게 전해진다. 전쟁은 인간의 본성과 공동체를 파괴하고 집단적 광기 속으로 빠져 들게 한다. 그녀들이 체험한 전쟁의 진실은 인간 파괴와 다름 아니다. 
그림 출처: 옆집 언니 페이스북 책 끝을 접다


그래서 이 작품은 반전 평화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또한 남성 중심의 여성 편견 의식을 고발하고 있다.



전쟁이 끝난 후 처녀 병사들에게 돌아온 것은 모멸과 능욕뿐이었다. 가슴에 단 빛나는 무공 훈장은 가차 없는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여자가 어떻게? 남자들과 전쟁터에서 뭐했나? 등. 그녀들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은 차가웠다. 여성과 남성으로 살아야 했던 그녀들의 전쟁은 또 다른 전쟁을 치러야 했다. 더 이상 그녀들은 전쟁영웅이 아니었다. 전후 40년이 지나서야 그녀들의 목소리는 전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 책은 페미니즘적인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


저자는 단순히 질문과 답변 형식의 인터뷰를 지양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정제하지 않은 채 하나의 이야기 방식으로 풀어내고 있다. 인터뷰어인 알렉시예비치는 거의 드러나지 않고 그녀들의 회고담을 통일성과 일관성을 갖고 읽을 수 있도록 배치했다.

다소 산만할 수 있는 구성 방식을 잘 극복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세계 전쟁사에서 가장 참혹한 내전을 치러낸 6.25 전쟁을 생각했다. 왜 우리는 알렉시예비치와 같은 작가가 없는 것일까. 아니면 아직도 그 목소리를 담기에는 현실적인 장애물들이 많다는 것인지. 이미 전쟁 그 자체는 여자의 얼굴이 아니라 짐승의 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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