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살리고, 나를 죽이는 책임감
우울증과 가장 가까운 감정은 무엇일까?
여럿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책임감’ 아닐까?
어제 친구들과 만난 자리에서 ‘결혼’이라는 주제로 이야기가 전개됐다. 그 자리에 있던 여섯 명의 친구들은 결혼, 육아를 겪으며 가장 크게 느끼는 감정으로 책임감을 꼽았다. 우울하고 나쁜 생각을 하려다가도 멈칫하게 되는 건 내 자식에 대한 책임감의 역할이 컸다고.
오늘 점심을 함께 먹은 J과장은 요즘 상사, 동료를 가리지 않고 자주 듣는 말이
“혼자 너무 책임감 가지면서 일하지 마”
라고 했다.
요근래 몇 달째 야근을 밥 먹듯이 하고, 어쩌다 칼퇴 하는 날이면 집에서 새벽까지 잔업을 하고 있다는 그는 실무는 물론 관리자 노릇까지 하느라 성장통을 단단히 겪고 있는 중이었다.
회사에서 내가 가장 혐오하는 사람 중 하나는 ‘책임감 없는 사람’이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욕먹기 싫어서’ ‘혼나기 싫어서’ 일한다. 책임감의 적정선을 아마도 그렇게 정해 놓은 것 같다.
사실 나의 학창 시절 생활기록부에 가장 많이 언급되는 단어도 책임감이다. 그 덕에 반장, 학생회장 등 온갖 감투를 썼고, 그런 내가 자랑스러웠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 책임감이 뻗는 영역은 비단 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연인관계, 즉 사랑이라는 감정에도 영향을 끼친다.
내가 8년 가까이 사귄 남자와 30대 중반이 돼서야 헤어졌을 때 가장 많이 든 생각과 주변에서 들은 얘기는 ‘그가 무책임하다’는 것이었다. 20대 중반에 만나, 10년 가까운 시간을 만나면서 결혼 얘기를 진지하게 꺼내본 적 없는 사람, 어찌 보면 내가 결혼 생각이 있다면 빨리 눈치채고 다른 길을 모색했어야 했다. 그러니 사실은 나의 미련함을 탓하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보다는 이렇게 한 사람의 시간을 낭비하고 감정 소모를 하게 만든 그를 비난하는데 더 골몰했다. 그를 수식하는 ‘무책임한’이라는 형용사가 내게 가장 위로가 됐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한때 사랑했던 사람이어야 했다. 그게 내 맘이 편했으니까.
얼마 전, 한 연예인의 자살 소식을 들었다. 생전에 그는 길냥이들에게 밥과 물을 나눠줬고, 고양이 여러 마리를 키우는 애묘인이었다고 한다. 그의 죽음에 대한 뉴스를 접하고 내 마음 한편엔 ‘그 고양이들을 어떻게 두고 떠나지? 무책임한 사람…’이라는 마음이 들었다. 하나 정작 그는 생전에 가장으로서 그 역할을 너무나 훌륭하게 해냈다고 한다.
책임감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우울한 감정이 극에 다다를 때 문득 내가 죽은 후,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린다. 비명 섞인 울음을 잔뜩 머금은 얼굴들.
사랑에 대한 책임, 일에 대한 책임. 정말이지 책임감은나를 살리고 또 죽인다.
회사에서 내 몫을 다하고 있지 못하다고 느끼는 순간, 내가 위로 받았던 순간은 묘하다. 야근하는 팀장을 두고, 당당하게(!) 칼퇴하는 파트장의 말이었기 때문이다.
나의 팀장은 편집증적인 성향의 완벽주의자, 워커홀릭이다. 그는 회사에서 보고서를 잘 쓰는 걸로 유명하며, 그의 보고서에는 논리의 빈틈이 없다. 정치력도 꽤 좋아 그를 따르는 후배도, 신뢰하는 선배도 많다. 일찍이 그는 이 회사에서 인정받고, 또 관리받는 인재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팀장이 돼서는 모드 전환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자기 성에 차지 않는 팀원들 때문에 도무지 실무에서 손을 떼지 못하며 그 무엇 하나도 자신의 손을 타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팀장이 되니 여기저기서에서 부르는 회의도 많아 보통 퇴근 이후가 돼서야 진짜 본인 업무를 본다.
’그런 팀장을 상사로 둔 파트장이 나라면?‘ 정말 괴로울 것 같다. 어떻게 해도 그의 눈높이를 맞추는 것은 어려운 일일 것임이 분명하니까. 파트장(張)이라는 자리는 또 얼마나 책임이 막중한가? 파트원들과 팀장 사이에서 양쪽을 오가며 조율하기도 해야 하고, 악역도 맡아야 하는 자리니까. 실제로 내가 잡지사를 다니면서 그놈에 ‘장’이라는 자리를 맡고 나서 괴로움이 시작됐다. 내 맘처럼 따라주지 않는 팀원들에 화가 났고, 그들을 향해 분노하는 나 자신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성격 파탄자가 되는 것 같았다. 만약 내가 ‘장’ 자리를 맡지 않고 팀원으로 내내 일을 했다면 아마 그곳에서 커리어는 더 연장됐을 것이다.
아무튼, 그토록 책임이 막중한(?) 자리에 있는 파트장과 1:1로 대화하던 중 나는 물었다.
“파트장님은 팀장님의 그 온갖 요구사항을 어떻게 견디세요? 스트레스받지 않으세요?”
“나? 왜? 아니 전혀.”
“어떻게 그렇죠?”
“어차피 내가 어떻게 하든 그 양반 입맛에 맞을 수가 없어. 그냥 나는 내가 할 만큼만 해야지. 그러면 된 거야. 그러니까 S과장도 너무 힘들어하지 마. S과장이 할 수 있는 만큼만 해”
그 자리를 파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파트장도 저 정도의 무게로 일하는데, 과장나부랭이가 뭐라고 그렇게 힘들어했던 건지, 그간의 내 괴로움이 깃털처럼 가벼워지는 순간이었다.
이후로 나는 책임감이 나를 짓누를 때쯤 그 말을 되새긴다.
과장나부랭이인 내가 뭐라고?
그렇게 되뇌면 꽤 위로가 된다
마흔쯤 되니, 책임져야 할 말과 행동, 그리고 사람들이
생겨 난다. 나는 이제 막 결혼했으니 내 남편, 그리고 남편의 가족들, 내가 키우는 고양이, 내 가족과 친구들.
생각해 보면 그들은 나에게 엄청난 책임감을 부여하진 않았다. 그저 존재하는 것, 세상에 있는 그 자체에 대한 책임감만 있으면 된다. 엄청나게 빛날 필요도, 무언가를 잘할 필요도 없다.
내가 그들에게 바라는 것이 그게 전부이듯이.
부디, 책임감에 짓눌려 있는 이들에게, 살아갈 수 있는책임감만 부여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