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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꼬투리 Dec 16. 2024

지독한 ‘책임감’의 굴레

나를 살리고, 나를 죽이는 책임감

우울증과 가장 가까운 감정은 무엇일까?

여럿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책임감’ 아닐까?

어제 친구들과 만난 자리에서 ‘결혼’이라는 주제로 이야기가 전개됐다. 그 자리에 있던 여섯 명의 친구들은 결혼, 육아를 겪으며 가장 크게 느끼는 감정으로 책임감을 꼽았다. 우울하고 나쁜 생각을 하려다가도 멈칫하게 되는 건 내 자식에 대한 책임감의 역할이 컸다고.

오늘 점심을 함께 먹은 J과장은 요즘 상사, 동료를 가리지 않고 자주 듣는 말이

“혼자 너무 책임감 가지면서 일하지 마”

라고 했다.


요근래 몇 달째 야근을 밥 먹듯이 하고, 어쩌다 칼퇴 하는 날이면 집에서 새벽까지 잔업을 하고 있다는 그는 실무는 물론 관리자 노릇까지 하느라 성장통을 단단히 겪고 있는 중이었다.

회사에서 내가 가장 혐오하는 사람 중 하나는 ‘책임감 없는 사람’이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욕먹기 싫어서’ ‘혼나기 싫어서’ 일한다. 책임감의 적정선을 아마도 그렇게 정해 놓은 것 같다.

사실 나의 학창 시절 생활기록부에 가장 많이 언급되는 단어도 책임감이다. 그 덕에 반장, 학생회장 등 온갖 감투를 썼고, 그런 내가 자랑스러웠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 책임감이 뻗는 영역은 비단 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연인관계, 즉 사랑이라는 감정에도 영향을 끼친다.

내가 8년 가까이 사귄 남자와 30대 중반이 돼서야 헤어졌을 때 가장 많이 든 생각과 주변에서 들은 얘기는 ‘그가 무책임하다’는 것이었다. 20대 중반에 만나, 10년 가까운 시간을 만나면서 결혼 얘기를 진지하게 꺼내본 적 없는 사람, 어찌 보면 내가 결혼 생각이 있다면 빨리 눈치채고 다른 길을 모색했어야 했다. 그러니 사실은 나의 미련함을 탓하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보다는 이렇게 한 사람의 시간을 낭비하고 감정 소모를 하게 만든 그를 비난하는데 더 골몰했다. 그를 수식하는 ‘무책임한’이라는 형용사가 내게 가장 위로가 됐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한때 사랑했던 사람이어야 했다. 그게 내 맘이 편했으니까.

 얼마 전, 한 연예인의 자살 소식을 들었다. 생전에 그는 길냥이들에게 밥과 물을 나눠줬고, 고양이 여러 마리를 키우는 애묘인이었다고 한다. 그의 죽음에 대한 뉴스를 접하고 내 마음 한편엔 ‘그 고양이들을 어떻게 두고 떠나지? 무책임한 사람…’이라는 마음이 들었다. 하나 정작 그는 생전에 가장으로서 그 역할을 너무나 훌륭하게 해냈다고 한다.

책임감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우울한 감정이 극에 다다를 때 문득 내가 죽은 후,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린다. 비명 섞인 울음을 잔뜩 머금은 얼굴들.

사랑에 대한 책임, 일에 대한 책임. 정말이지 책임감은나를 살리고 또 죽인다.


회사에서 내 몫을 다하고 있지 못하다고 느끼는 순간, 내가 위로 받았던 순간은 묘하다. 야근하는 팀장을 두고, 당당하게(!) 칼퇴하는 파트장의 말이었기 때문이다.

나의 팀장은 편집증적인 성향의 완벽주의자, 워커홀릭이다. 그는 회사에서 보고서를 잘 쓰는 걸로 유명하며, 그의 보고서에는 논리의 빈틈이 없다. 정치력도 꽤 좋아 그를 따르는 후배도, 신뢰하는 선배도 많다. 일찍이 그는 이 회사에서 인정받고, 또 관리받는 인재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팀장이 돼서는 모드 전환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자기 성에 차지 않는 팀원들 때문에 도무지 실무에서 손을 떼지 못하며 그 무엇 하나도 자신의 손을 타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팀장이 되니 여기저기서에서 부르는 회의도 많아 보통 퇴근 이후가 돼서야 진짜 본인 업무를 본다.

’그런 팀장을 상사로 둔 파트장이 나라면?‘ 정말 괴로울 것 같다. 어떻게 해도 그의 눈높이를 맞추는 것은 어려운 일일 것임이 분명하니까. 파트장(張)이라는 자리는 또 얼마나 책임이 막중한가? 파트원들과 팀장 사이에서 양쪽을 오가며 조율하기도 해야 하고, 악역도 맡아야 하는 자리니까. 실제로 내가 잡지사를 다니면서 그놈에 ‘장’이라는 자리를 맡고 나서 괴로움이 시작됐다. 내 맘처럼 따라주지 않는 팀원들에 화가 났고, 그들을 향해 분노하는 나 자신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성격 파탄자가 되는 것 같았다. 만약 내가 ‘장’ 자리를 맡지 않고 팀원으로 내내 일을 했다면 아마 그곳에서 커리어는 더 연장됐을 것이다.


아무튼, 그토록 책임이 막중한(?) 자리에 있는 파트장과 1:1로 대화하던 중 나는 물었다.

“파트장님은 팀장님의 그 온갖 요구사항을 어떻게 견디세요? 스트레스받지 않으세요?”

“나? 왜? 아니 전혀.”

“어떻게 그렇죠?”

“어차피 내가 어떻게 하든 그 양반 입맛에 맞을 수가 없어. 그냥 나는 내가 할 만큼만 해야지. 그러면 된 거야. 그러니까 S과장도 너무 힘들어하지 마. S과장이 할 수 있는 만큼만 해”

그 자리를 파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파트장도 저 정도의 무게로 일하는데, 과장나부랭이가 뭐라고 그렇게 힘들어했던 건지, 그간의 내 괴로움이 깃털처럼 가벼워지는 순간이었다.

이후로 나는 책임감이 나를 짓누를 때쯤 그 말을 되새긴다.

과장나부랭이인 내가 뭐라고?

그렇게 되뇌면 꽤 위로가 된다


마흔쯤 되니, 책임져야 할 말과 행동, 그리고 사람들이

생겨 난다. 나는 이제 막 결혼했으니 내 남편, 그리고 남편의 가족들, 내가 키우는 고양이, 내 가족과 친구들.

생각해 보면 그들은 나에게 엄청난 책임감을 부여하진 않았다. 그저 존재하는 것, 세상에 있는 그 자체에 대한 책임감만 있으면 된다. 엄청나게 빛날 필요도, 무언가를 잘할 필요도 없다.

내가 그들에게 바라는 것이 그게 전부이듯이.

부디, 책임감에 짓눌려 있는 이들에게, 살아갈 수 있는책임감만 부여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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