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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꼬투리 Dec 09. 2024

나는 일을 좋아한다

워라밸이고 뭐고 상관없이

나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결론을 내려버리니 개운하다. 결론보다는 인정이라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다. 모두가 워라밸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말하는 가운데 일을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건 용기가 필요하다.

그동안 나는 '워라밸'이라는 말에 발목 잡혀 일을 좋아하는 사람은 곧 워커홀릭의 다른 말처럼 느끼곤 했다. 그래서 내가 그런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왜냐면, 나는 워커홀릭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터에 있을 때 나는 홀로 집을 지키고 있는 고양이를 생각하며, 남편과 떠날 다음 휴가지를 고민한다. 동시에 퇴근하는 길에 오늘 한 일과 내일 할 일을 생각한다. 그날 마무리 했어야 할 일을 마치지 못하고 내일의 나에게 미루고 오는 날은 찝찝하다.

나는 그저 내 몫을 하지 못하는 자신이 괴롭다. 그 감정은 내가 잘 살고 있을까?라는 질문이 내가 잘 살고 있지 않다는 결론까지 다다른다. 그렇다면 내가 꽤 잘 살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나만의 생활 루틴은 무엇이 있을까?


✔️일주일 3회 이상 일기를 쓰고 있나?

✔️일주일 3회 이상 운동을 하고 있나?

✔️자기 전에 책 한 챕터를 읽을 만큼 여유가 있나?

✔️퇴근하고 집에 와서 고양이와 놀아줄 시간이 확보됐나?

✔️하루에 할당된 영양제를 잘 챙겨 먹고 있나?

✔️오늘 입은 옷을 옷장에 잘 넣고 있나?

✔️아침에 이부자리는 잘 정리했나?


그리고, 요즘 체크되지 않은 날이 많은, 회사에서 내 몫을 잘 해내고 있나?..

꽤 오랫동안 체크되지 않은 채 지나가는 날이 많은 그 항목 때문에 나는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고 있는 기분이다. 그러나 최근 약간에 빛이 보인다.

며칠 전 라디오에서 들은 한 평론가의 말 때문이다.

그의 말을 요약하자면 인간의 뇌는 철저히 생존을 목적으로 그 기능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부수적으로 하는 일이 철학적인 고민, 즉 실존과 가치에 대한 것을 생각한다고. 나는 인간의 뇌를 '일'로 치환시켜 봤다. 내가 일을 하는 주된 목적은 무엇인가? 생계다. 월급이며, 돈이다. 그리고 그 돈을 위해 내 능력과 시간을 준다. 사실 능력보다는 시간이 훨씬 와닿는다.

그리고 그 시간을 가장 높은 가치를 쳐주는 회사에 다니는 게 내 생존에 유리하다. 자아실현은 부수적인 것이다. 그러나 사실 나는 늘 자아실현을 우선으로 하는 환경에서 일을 해왔다. 애초에 내가 하고 싶었던 방송 쪽 일이 그랬고, 실제로 내가 10년 넘게 몸 담았던 집지계도 매우 흡사했다. 함께 일하는 기자들은 물론 포토그래퍼, 스타일리스트, 헤어/메이크업 아티스트.... 모두가 스스로가 하고 싶은 것을 업으로 삼아 일하고,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명성을 쌓아 돈을 버는 사람들이었다. 그중에 기자는 그 보상이 가장 적은 측에 속했고, 나는 그 부분에 부당함을 느꼈다. 연차가 쌓여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퇴사를 택했다.

며칠 전 같은 회사에서 일했던 잡지계 선배는 말했다.

“우리가 돈에 맺힌게 있지”

좋아하는 일을 하다 보면 돈이라는 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거라고 여겼던 시절은 끝났다. 아니, 적어도 나에겐 그렇다. 성공한 아이돌만큼이나 자아실현과 명성 그리고 돈을 벌 수 있을 확률은 현저히 낮다. 그러니 나와 같은 범인들에게는 '모두 다 가질 수 없다' 혹은 '모든 게 완벽하게 내 맘에 들 수 있는 일은 없다'라는 말이 가장 현실적인 조언이자 답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일이 좋다. 아니 열심히 제 몫을 하는 내가 좋다.

시간 때우며 정년퇴임을 기다리는 만년 차장, 부장처럼 일하고 싶지 않다. 그렇게 회사에서 시간 보낸다면 나는 영영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조금 과장되게 말하자면 나는 현재 뇌의 구조를 바꾸는 과도기에 있다. 그래서 생계를 위한 일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게 괴롭다. 하지만 나는 열심히 회사에서 1인분의 일을 할 것이다. 이를 노예근성이라고 비하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노예는 주인이 시켜야지만 일한다. 열심히 일하는 나 자신이 좋아서 일하는 노예는 없다. 상사가 평가하거나 회사가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일하는 내가 좋다.

그렇기에 내가 과일바구니의 아보카도이든, 샤인머스켓이든, 망고스틴이든 상관없다.


나는 내 몫을 해내는 나일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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