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맞이 점집이 아닌 정신과를 예약함
노화를 얘기할 때 우리는 ‘속도’에만 집중한다. 요즘엔 ‘저속노화’라는 말이 눈에 띄던데, 어째서 나이 듦이 속도에만 국한시키는 것일까? 물론, 나이 자체가 시간과 아주 밀접한 개념이니만큼 거기에 집착하게 되는 것도 일견 이해는 된다. 하지만 속도를 늦춘다고 한들 가는 세월을 막을 순 없으며 노화도 막을 수는 없다. 어차피 인간에게 노화와 죽음은 불가피하다. 말 그대로 답은 정해져 있다.
나이는 속도보다 방향에 집중해야 한다. 어디를 향해, 어떻게 살 것인가? 나는 나이의 질(Quality)을 말하고 싶다. ‘나잇값’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모르긴 몰라도 그들은 시간이 지나면 나잇값은 절로 얻게 된다 여길 것이다. 그러나 그건 무임승차다. 나이에 맞는 경험치에 살면서 틈틈이 챙기는 자아성찰, 잘못에 대한 복기와 반성, 자신에 대한 엄격함과 타인에 대한 관대함…. 그런 것을 겪으며 이전보다 조금씩 괜찮아지는 자신을 제대로 볼 줄 아는 자기 객관화까지.. 세상에서 가장 값 비싼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단연코 나잇값이라 하겠다.
그런 면에서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게, 바로 나잇값 제대로 못하는 늙은이가 되는 것이다. 회사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은 부러워하는) 월급루팡의 삶이 싫은 것도 무임승차하는 뻔뻔한 노인처럼 되기 싫다.
연말이 되니, 다시금 나이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어느 나이대부터는 더 이상 타인이 내 나이를 묻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나보다 윗사람, 아랫사람인 것만 파악되면 그다음부터는 나이를 일일이 외우지 않는다. 솔직히 궁금하지 않다. 해마다 +1이 되는 단순한 산수적 나이는 내것마저도 낯설다. 내가 39살이었던가, 40살이었던가? 여기에 ‘윤 나이’네, ‘한국 나이네’, ‘원래 나이네’라는 다양한 옵션까지 생겨 혼란스러움은 가중되고 있다.
주변에 자기 확신에 차 직장생활을 접고 창업을 꿈꾸거나 엄연히 법인까지 내 사업체를 운영하는 친구들이생겼다. 그중 친구 K는 6살 난 아이를 둔 엄마이면서도 결혼 전보다 더더욱 일에 열의를 갖고 있다.
“어느 날 아들이 그러더라. “엄마는 일하는 걸 좋아하잖아. 엄마가 좋으면 나도 좋아” 내가 너무 일만 하는 엄마라서 아들에게 미안했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죄책감이 덜어졌어”
싱글 일 때보다 결혼 후에 더욱 승승장구하는 친구를 보며 나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질투를 느끼고 있었다. 엄연히 나와 다른 업종의 일을 하고 있는데 왜 그럴까? 그 질투의 근원을 찾아보면 K의 자신감 넘치는 말투와 보란 듯이 말한 대로 성취해내고야 마는 당당한 모습 때문이었다. 그 질투심이 극해 치달았던 순간은 K가 출간을 결심하고 대형 서점에서 북토크까지 진행하는 걸 봤을 때였다.
잡지사에서 선배들이 단행본을 내는 건 종종 봐왔지만 내 주변에 글을 업으로 삼지 않는 사람이 책을 낸 경우는 드물었다. 나에게 출간한다는 건 글쟁이로서 가장 큰 성취며, 내 생에 가능할까 싶은 버킷리스트이자 로망이었다. 동시에 세상엔 너무 엉망인 책이 많다는 생각도 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나무에게 미안하지도 않냐고 항의 메일을 보내고 싶을 정도로 쓰레기 같은 책들이 많았다. 나무에게 미안하지 않으려면 책을 낼만큼 글의 완성도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내 책을 발간하는 일은 이번 생엔 글렀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K가 그 영역에 발을 들인 것이다. 책 내는 작가들은 저마다 다른 이유와 목적이 있다. K는 책을 출간하여 프로필 한 줄이 필요했고, 말하는 것을 꽤 잘하고 좋아하는 그녀는 그걸 시작으로 강연회도 하고 싶다고 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본인의 이야기로.
잡지사에 오래 다녔던 나에게 K는 어느 날 대뜸 아는 출판사가 있는지, 지인을 통한다면 비교적 쉽게 출판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는 눈치였다. 실제로 그런 인맥이 내겐 없었고, 앞선 이유로 배알이 꼴리는 걸 가까스로 참으며 물었다.
“출판사에 바로 가져갈 만큼 글을 많이 썼어? 일단 블로그나 브런치에 올려보지 그래”
“글? 글은 엄청 많이 써놨지”
이런 자신감이라면 언제고 책을 내긴 내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정말로 몇 달 만에 친구의 책이 세상 밖으로 나왔다.
그때 느꼈던 질투심은 시간이 지나자 어느덧 부러움으로 변질되고 있다. 그런 자기 확신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혹시, 만약에, 설마..로 시작하거나 ‘~것 같다’ ‘~인지도 모른다’로 끝나는 것.
내가 입에 달고 사는 말이다. 아주 편하게 글을 쓰는 일기장에도 자주 등장한다. 톡 까놓고 말해 나는 나이를 먹을수록 자기 확신이 사라진다. 굳건하게 믿었던 사람이 떠나가거나, 살면서 강력하게 믿은 신념에 배신당하거나, 자신감 찬 언행을 하다가 망신을 당하거나 하는 경험 때문일 것이다. 기질적으로 소심하고 내성적인 나에게 그런 경험들은 더욱 두꺼운 내면의 등껍질로 고개를 더 쳐 넣게 했다.(방금도 ‘쳐 넣게 된 지도 모르겠다’라고 쓸 뻔..)
20대 때 비해 시간이 별로 없다고 생각하니, 선택하는 건 더 어렵다.
나이를 어떻게 해야 ‘잘’ 먹는지도, 어떻게 해야 잘 살 수 있는지도 고민이다. 가끔은 화려했던 과거의 기억과 (비교적) 초라해 보이는 현재가 오버랩 돼 유효시간 지난 자신감과 현재 진행형인 상실감이 휩쓸고 갈 때도 있다.
바람같은 시간에 휩쓸려 나이 먹지 않고 꼿꼿하게 나의 방향대로 살고, 나이를 먹으려면 나 자신을 더 많이 아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상담 한 달 전에 선착순으로 문자 보내야 겨우 예약할 수 있다는 유명한 점집 대신, 오늘 정신과 진료 예약을했다. 미래를 예측하는 것보다 현재의 나를 파악하는 게 더 필요한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적어도 나를 얘기할 때, 불확실한 말로 끝내는 일이 줄어들 수 있도록.
하지만 대반전, 친구에게 추천받은 동네 정신과의원은 얼마나 인기인지 오늘 (12월 2일) 전화했는데 내년 3월31일에나 예약이 가능하다고 한다. 세상에 나 같은 사람이 그만큼 많다는 거겠지? 내년 1분기까지 잘 버텨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