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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꼬투리 May 18. 2022

사람은 소소한 것에 무너진다

소소하고 사사로운 것의 힘

사람은 소소하고, 사사로운 것에 쉽게 무너진다.

그게 슬픔이든, 분노든, 사랑이든…

이 말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 드라마,

아니 그 사사로운 상황을 너무나 잘 캐치한 드라마.


요즘 내가 재미있게 보있는 <나의 해방일지>라는 드라마에서였다.

사실 이 드라마에는 배우들의 연기, 연출, 소품 등의 디테일이 정말 현실감 있게 잘 살아 있고,
동시에 드라마적이다.

현실적이면서도 드라마틱할 것.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의 장점을 제대로 갖추고 있다.


내가 이 드라마에서 가장 공감하고 또 애정을 느끼는 인물은 염家의 세 남매 중 바로 염창희(이민기)다.
그는 적당히 속물적이고, 적당히 순진하고 순수하며, 또 적당히 엉뚱하다.

나 혹은 내 주변에 꼭 있을 것 같은, 현실적인 인물이다.


삼 남매 중 둘째 염창희, 사진=<나의해방일지>

그는 리테일 회사에서 편의점 점포를 관리하는 영업사원이다.

그의 바로 옆자리에는 염창희가 언제든 소리를 버럭 지르고, 사무실을 뛰쳐나간다고 해도,

누구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만큼, 어마어마한 밉상 인물인 ‘정 선배’가 앉아 있다.


염창희는 정선배에 대해 얄미움, 싫음을 너머 ‘극혐’할 정도로 안 좋은 감정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가 오랫동안 품었던 분노 표출은 엉뚱하게도, 치사하고 짜치게도 먹을 것 앞에서 폭발했다.


점심시간 맛집 앞에서 웨이팅 하고 있는 염창희 앞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새치기를 해버렸던 것.

얄미운 정선배 사진=<나의해방일지>

정선배의 밉상짓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맛있게 점심을 먹고 사무실에  정선배는 염창희에게 
내일  먹을 거냐 물으며, 염창희를 쫓아가겠다고 한다.
여기에서 인내심의 한계치에 다다른 염창희는 파르르 분노를 끝내 숨기지 한다.

사진=<나의 해방일지>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화내며 따져 물었다.

정선배는 점심 같이 먹자는게 이토록 화낼 일이냐며 반문하고 이에 염차희도 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날  염창희는 푸념 하듯 술자리에서 말한다.


“씨(발), 서릿발 날리게 무섭게 터질 게 백 개는 되는데, 씨(발) 없어 보이게 먹는 걸로 터지고 씨(발)”


※괄호 안에 말은 대사에는 없으나 염창희의 속내를 가공하여 넣었습니다.
맞다. 진짜 드라마처럼 마땅히 화내야 하는 상황에 정확한 상대를 향해 화를 내는 장면은
현실에서 그리 흔하지 않다.
(그걸 드라마에서 봤을 때 희열을 느끼는 건 현실에서 그러지 못하기 때문이리라)

말 더듬고, 염소 소리만 내지 않아도 다행이겠지.

아니, 화낼 타이밍만 놓치지 않아도 분통은 덜 터질 것이다.

 

현실에선 정말 화내야 할 상황에서 화내기보단,

없어 보이는 상황에 그동안 쌓였던 것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버리고 만다.

물 한가득 담긴 컵에 고작 작은 물방울 하나 떨어졌을 뿐인데 넘쳐 나듯.

첨벙첨벙거린 감정을 누가 살짝만 건드리면 쏟아지고 만다. 정말 없. 어. 보. 이. 게.


이 장면을 보며 또 떠오른 드라마 <로맨스는 별책부록>.

주연은 이나영과 이종석, 비현실적인 비주얼의 배우들과 나름 흥미로운 이야기로 썩 재미있게 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다른 장면은 잘 기억나지 않는데,

이 드라마에 출연한 배우 이선영(서영아)과 조현철(봉지홍)이 이혼한 사내 부부로,

이들이 결정적으로 헤어지게 된 계기가 됐던 에피소드는 퍽 인상적이었다.


그 일만 없었다면 그저 평범하게 소소하게 지나갔을 일상적인 하루,

이 커플은 지하상가를 함께 거닐다 한 신발가게 들어간다.

사진=<로맨스는별책부록>


아내인 서영아는 맘에 드는 구두의 가격을 묻는데, 가게 사장은 매우 심드렁하고 무례한 말로 무안을 준다.
 어차피 사지도 않을 거면서 가격은 왜 묻냐, 재수 없게.
(대사를 옮기기에도 짜증 나서 패스, 대충 이런 뉘앙스였다)

그 말을 듣고 가게를 나서는 두 사람.

기분 나쁘다는 아내의 말에 남편 봉지홍은 되레 그 가게 주인 편에 선다.

사진=<로맨스는별책부록>
“밥 먹는데 짜증 났겠지. 장사하다 보면 별 사람 다 있을 거 아냐. 아이, 솔직히 당신 신발 살 생각 없었잖아. 계속 가격만 물어보고..”

이 말에 빠직한 아내는 염창희가 그랬듯 유치하고, 없어 보이는 말을 내뱉게 된다.

“지금, 누구 편드는 거야 당신?”


 말은  관계의 끝이자 새로운 전환점이 된다.  
아내는 지하상가가 떠나가게 소리치고, 이내 다음날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한다.

이 에피소드 하나에 두 사람의 무수한 사연이 깔려 있다.

아내가 모르는 남자에게 쌍욕만  들었을  개무시를 당하는 상황에서도 고고하게 시집을 펼쳐 읽던 남자.

아내는 그가 더 이상 내편이 아니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팔짱만 끼고 그동안 남편은 모든 상황을 방관했으리라.

아내는 언제나 내편이 되지 않는 남자를 더 이상 신뢰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람은 정말 사사롭고 사소한 것에 무너진다.

오히려 크고 거대한 사건 앞에서는 견고 해지지만,
누군가에게는 별 것 아닌 일에, 흘러가는 말에 무너지고 만다.


이 말은 반대로
우리를 강하게 하는 것들은 다름 아닌 소소하고 사소한 것들이라는 것이기도 하다.  
짜치고, 유치하고, 없어 보여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하릴없이 사람은 감정 앞에서 짜치고, 유치하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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