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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꼬투리 Jul 27. 2022

말하면 뭐해?

소통 허무주의 혹은 소통 무용론에 대하여

터키시앙고라 고양이를 키우는 선배는 끊임없이 자신의 고양이 알렉스에게 말을 걸었다.

"알렉스 뭐해?"

"알렉스 배고팠쪄?"

"알렉스 심심했져?"

... 나는 선배를 보기 전까지 고양이라는 종족을 전혀 알지 못했다.

강아지 다음으로 사람들이 많이 키우는 반려동물 정도.

알렉스는 쉴 새 없이 떠드는 고양이었고, 선배 역시 수다스러운 사람이라 충분히 대화를 나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몇 달 후, 알게 됐다.

알렉스는 듣지 못하는 고양이라는 걸.

흰 털의 파란색 눈을 가진 알렉스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는 고양이었다.

그걸 안 순간 난 "선배, 여태 그럼 듣지도 못하는 애한테 그렇게 말을 걸었던 거예요?"라고 웃으며 물었다.

언제나 유쾌하고 수다스러운 선배는 말했다.

"응, 뭐 어때. 알렉스는 그래도 다 알아"


그거 말해서 뭐해?

소통 허무주의 혹은 소통 무용론에 빠지는 순간이 많다.

상대가 엄청나게 고집이 세거나, 똑같은 잘못을 반복적을 하거나 혹은 나보다 월등히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거나, 힘이 센 사람이라거나.

혹은 '똥을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하냐?'라는

뭐 그런 이유로 말이다.


그게 아니라면 말해야 하는 사람의 경험이나 성향에 따라 다르게 반응할 것이다.

어쨌든, 그 저변엔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으니, 나와 맞지 않는 사람과 애써 대화를 나누지 않는 것이다.

일종의 회피인 셈이다.

어차피 내 의견을 말해봤자 싸움이 되거나 내 힘만 빠질 게 뻔하니

일단은 그 사람이 하라는 대로 하거나 무시하거나 하는 방법을 취하는 게 어찌 보면 현명한 처세술일 수 있다.

특히 직장인 N연차라면 꽤 현명한 처사이자, 직장인으로 살아남는 노하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나이를 먹고, 연차가 쌓이면 쌓일수록 그게 안된다.

어렸을 때는 오히려 무비판적으로 "까라면 까"가 됐다.

어차피 책임은 내가 아닌 나의 상사가 질 테니..라는 마음도 아니었다.

나는 학창 시절에도 그랬고, '범생이'기질이 다분했기 때문에 학교에서 정한 교칙,

선생님의 말씀에 거의 무비판적으로 복종하는 쪽에 가까웠다. (여기에서 내가 infj라는 건 안 비밀)


그런데 나이를 먹으니, 적당한 타협 혹은 무시, 납득되지 않은 상황에서 순종이 잘 되지 않는다.

회사에서는 그나마, "그래, 내 월급에는 이런 것도 포함이지"라는 말로 '퉁'치는 게 가능한데,

인간관계에서는 더욱 힘들다.  

상대에게 말해서 그가 바뀌길 바라거나, 이 상황을 개선시키고야 말겠다는, 오은영 박사님과 같은

남다른 의지와 전문가적 식견에 의한 것이 (당연히) 아니다.  

나도 바보가 아니니 사람이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쯤은 안다.


하지만 말을 하지 않으면

나를 불편하게 했던 그 상황은 이미 지나가버리고,

나를 불쾌하게 했던 그 사람은 그 언행을 반복한다.

그러니 나는 상대에게 통보하는 차원의 마음으로 말한다.

나중에 혹시라도 같은 상황이 반복돼 내가 폭발했을 때,

최소한 나에게는 적당한 알리바이가 형성된다.

"이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이런 것을 정~말 싫어하는구나"


아무런 징후 없이 바로 그 자리에서 폭발해버리면 나 혼자 미친년 되기 매우 쉽다.

분명 같은 문제로 쌓인 게 많았을 것이라는 속내를 알아주는 이는 별로 없다.


상대는 "갑자기 쟤가 왜 저래? 오늘 안 좋은 일 있었나 보다"라며

자기의 잘못 보다는 상황의 탓, 상대의 예민함으로 책임을 전가시킬 수 있다.

난 그걸 참을 수 없다.


같은 이유로

나에게 중요한 사람일수록 상대를 오해하고 싶지 않다.

내 마음대로, 내 생각대로 상황을 예단하거나 그의 말을 오해해서

그동안 내가 상대에게 쌓았던 좋은 감정을 해치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난 오해할 수 있는 상황이 오면 상대에게 꼭 묻는다.

오해라는 것은 정말 정전기 같아서,

한 번 시작되면 그다음에 상대의 모든 말과 행동이 그 오해에 들러붙는다.

'역시 내가 생각했던 게 맞았어'

하지만 내가 오해를 풀기 위해 나를 불편하게 했던 상황에 대해 묻는 건

'역시 내가 오해한 거였구나'

라는 걸 깨닫기 위함이다.


내 오해가 오해였다는 걸 확실히 하고 싶은 마음.


그러려면 물어야 하고, 말해야 한다.

그리고 상대는 충분히 변명할 기회를 가져야 한다.

만약 끝끝내 내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정직하게 말하지 않는다면,

"난 당신을 오해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하는 말이다"라고도 솔직히 말한다.

그 오해가 진실이라면 내가 그동안 상대에 대해 과대평가를 했던 것이고,

딱 그 수준의 대우를 해주면 된다.

이를 묻는 과정은 매우 껄끄럽다.

경험상 그 말을 먼저 꺼내면서도 애써 내가 틀리길, 내가 오해한 게 맞길 바라는 마음이 크면 클수록

상대에 대한 애정이 크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과정을 불편해하지 않고 충분히 공들여 설명하고, 변명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는 분명 한 단계 도약되고, 한 층 더 깊어지는 건 확실하다.

사회생활하면서 점점 더 인간관계를 맺기 어렵고,

사회에서 친구 사귀기 힘들다고 말한다.

나 역시 힘들지만, 그럼에도 지금 곁에 남아 있는 사회생활하다 만난 친구를 떠올리면,

학창 시절에 사귀었던 친구들 못지않게 애틋한 마음이 든다.  

30대 후반의 친구를 사귀는 방법은 이렇다.   


퇴근해서 집에 오면 조조는 비명과 가까운 소리로 나를 반긴다.

왜 이제 왔냐고 묻는 것 같기도 하고, 너무 심심했다고 투정 부리는 것 같기도 하고,

반가워 죽겠다는 표현 같기도 하다.

그런데 그게 무슨 말이든 나는 말한다.

"조조, 잘 놀았어? 뭐하고 놀았어?"

운이 좋으면(?) 조조는 내 질문에 답을 하듯 소리를 낸다.

내 말을 정말 알아 들었는지는 중요치 않다.

그냥 내가 조조, 너와 소통하고 싶어 애쓴다는 걸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인 거다.


선배가 귀가 들리지 않는 알렉스에게 말을 걸었던 것처럼.

선배의 그 마음을 난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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