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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꼬투리 Aug 22. 2023

내 고양이를 대하는 그 남자의 자세

내가 키우는 반려동물이 내 앞길을 막는(?) 장애물이자, 콤플렉스의 일부가 되는 경우가 있다.

특히 연애를 할 때 그렇다.  

사실 조조를 키운다고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이 가장 우려했던 것 중엔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도 있었다.

연애하고 싶다면서 고양이를 키운다고 하니, 결혼은 고사하고 연애를 포기하는 사람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었다.

“앞으로 네가 남자를 만날 때 이상형 하나가 추가되겠지. 고양이를 싫어하지 않는 사람”


이 말은 꽤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나이를 먹어 노안은 올지언정 사람 보는 눈은,

(나쁘게 말하면) 점점 까다로워지고 (좋게 보면) 좋아지는데

여기에 나는 조건 하나를 더 추가하는 셈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우려에 나는 반항하듯 말했다.

“고양이 싫다고 하는 사람을 애초에 만나지 않으면 되죠!”


글쎄, 인생은 언제나처럼 내 맘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걸 나는 왜 매번 망각할까?

조조를 키운 이후 나는 2번의 연애를 했다.

나를 걱정했던 사람들의 우려와 달리 다행히 고양이를 싫어하는 남자들은 아니었다.

다만, 나는 조조 덕에 추후에 일어날지도 모를 육아의 상황을 아주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너무나 단조롭고 1차원적인 비유일 수 있지만 고양이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미래에 생길지도 모를 나의 아이를 대하는 (미래의 남편이 될) 그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공교롭게도 두 남자 모두 고양이를 싫어하진 않지만 고양이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시작은 비슷했지만 그 과정은 많이 달랐다.


고양이를 모른다면 고양이가 싫어하는 행동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이를 테면 먼저 다가가 다짜고짜 만지기부터 하는 것들.

아직 친하지도 않고, 낯선 이의 냄새에 익숙해지지도 않았는데 섬뜩 다가오는 건

고양이 입장에서는 너무 두려운 일이다.

더군다나 덩치 큰 남자가 자신에게 성큼성큼 다가온다고 생각해 보라.

그럴 때마다 조조는 있는 힘껏 자신의 작은 몸을 크게 부풀렸다.


나는 조조가 인간을 두려워하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다.

언제나 조조에게 인간은 먼저 다가가겠다고 다짐만 한다면 친해질 수 있는 존재였으면 한다.

물론 내 욕심일 수도 있지만

인간에 대한 경계심을 늘 안고 살아야만 생존하는 길냥이들의 안쓰러운 본능을

안온한 내 집에서 살고 있는 조조에게까지 심어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남자친구 A는 조심성을 갖지 않았다.

상대를 모르면 모를수록 조심하는 나와 달리, 그는 모르니까 더욱 용감하게 굴었다.

흔하게 깔려 있는 고양이에 대한 상식마저도 찾아보는 노력은 기울이지 않았다.

동물 그까이꺼 대~충 친해지면 된다라는 안일함 혹은 나를 거부할 동물은 없다 라는 오만함 때문이었는지,

단순한 게으름 때문이었는지 알 길은 없다. 그저 자신의 3~5살 되는 조카와 놀아주듯 연신 까꿍소리를 내며 깜짝 놀래키키 일쑤였다.

이유가 무엇이든  

조조는 A가 우리 집에 올 때마다 짜증 섞인 울음소리를 냈고, 예민해졌다.

그런 조조를 보는 건, 나에게도 스트레스였다.

조조가 하악질을 하며 몸을 크게 부풀리는 건, 그만큼 경계를 갖고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이며,

너를 향한 최후의 경고를 하는 것이라고 말해도 좀처럼 그는 행동을 고치려 하지 않았다.

“귀여워서 그러지~”

라는, 힐난하는 나에게 되레 서운해하는 듯 변명을 할 뿐이었다.


나는 그런 식 의 애정표현은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누구나 각자의 사랑방식이 있다. 처음엔 이 방식의 차이로 오해하고, 다투고, 이해한다.

그러다 보면 서로가 원하는 사랑방식을 알게 되고, 그것대로 표현하는 것,

그러니까 상대가 원하는 방식에 맞춰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조조를 키우며, 고양이들이 싫어하는 행동, 사랑받는다고 느끼는 집사의 행동, 진짜 집사와 교감할 때 보이는 행동 등을 열심히 찾아봤던 것도 바로 그런 이유였다. 조조가 원하는 사랑 방식을 취하고자 하는 내 마음.  A는 그런 내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려는 것처럼 보였다.

점점 나는 조조를 닮아갔다.

A가 내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짜증 나고, 화가 났다.


그렇게 나는 그와 헤어졌다.

물론 헤어짐의 이유가 모두 조조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나를 보면, 즉 조조에게 대하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앞으로 나에게 일어날 일들을.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나 역시 조조 못지않게 조심스러움이 많고,

내 영역을 지키고 싶어 하고, 천천히 마음 표현하는 걸 선호한다는 것을.


다행히 지금의 남자친구는 강아지만 키웠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조조를 대하는데 무척 조심스러웠다.

아무리 조심스럽게 만져도 짜증을 내고, 손으로 싫다고 저항하는 조조에게

“알았어, 알았어”라며 뒤로 물러서기도 했다.

포복자세로 멀찌감치 물러서야 하는 순간에도 "귀여워"라는 말을 연신했다.

(조조의 앙칼진 반응에 내가 민망해질 정도였다)   

한 번은 그가 아토피에 고양이 알레르기까지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나는

미래를 생각하며 만나는 우리에게 자칫 조조의 존재가 선택의 문제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괴롭고 고통스럽다고 토로했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나는 전혀 고민하지 않아. 넌 가족을 선택할 수 있어? 내가 너를 만난다는 건, 조조와 함께 하겠다는 말이야”

세상에 이런 정답 같은 대답이라니.

그는 내가 말하지 않았음에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지금은 그의 집 거실에 손수 만든 캣타워가 있다. 미래에 우리가 살 집에는 이미 조조의 방 하나가 있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반려인으로서, 함께 하는 동물의 존재가 부담이자 짐으로 느껴지는 상황은 전혀 없다고 말할 순 없다. 이따금씩 어떤 부모도 아이가 세상에 없다면 진작에 이혼했을 것이라고 하고, 아이만 없어도 나는 좀 더 성공했을 거라고 말하지 않나? 그것처럼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 역시 충분히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다.

분명한 건 함께 사는 반려동물로 인해 중요한 어떤 선택에 더욱 현명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반려동물을 내 사랑에 이용하는 것이 조금 미안하긴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존재를 양자택일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하는 모두와 함께 존재할 수 있는 충만한 삶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따금씩 나를 왜 이토록 괴롭게 만드는 놈과 만나 고생시키냐고 꾸짖는 듯한

조조의 눈빛이 떠올리면 미안해진다.

유난히 덩치 큰 남자 앞에서 움츠려 드는 것도,

괜스레 조조가 안 겪어도 될 상황을 나쁜 기억으로 심어준 것 같아 마음이 안 좋다.


그래서 난 조조에게 묻고 싶다.

요즘은 어때? 나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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