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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티 Jan 05. 2022

이야기의 힘

첫 문장을 어떻게 써야 할지 망설일 때가 있다. 일단 첫 문장을 써 내려가면 신기하게 손가락이 저절로 춤을 추면서 다음 문장은 따라오는 듯하다. 막상 글을 쓸 때 무슨 내용을 어떻게 써야 할지는 잘 모르겠으나 수도꼭지처럼 물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듯 당연하게 움직이는 손가락이 신기하다. 글은 쓴다는 것은 대체 어떤 의미일까? 소위 말해 작가라는 사람들은 정말 우리랑 다른 사람들일까? 타고난 천재이거나 기구한 운명과 환경에 던져진 사람들이라서 그렇게 기이한 스토리를 만들 수 있단 말인가? 구두를 닦는 사람은 구두만 봐도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흔히 말하는 통찰력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힘이라고 하는데, 그런 능력은 비단 작가뿐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작가나 글을 쓰는 사람을 그것을 글로 표현하는 능력을 갖췄을 뿐이다. 서울 택시기사는 웬만한 신호와 막히는 길을 다 알고 있으며 어떻게 돌아가는지 빨리 가는지 알고 있다. 또한, 셰프들은 레시피나 밀 키트에 의존하지 않고, 대충 직감으로 간을 보고, 대충 무심하게 칼질을 썰어내지만 언제나 같은 맛을 낸다. 누구나 생각과 통찰력은 있지만 그것을 '표현' 하냐 못하냐가 중요하다.


그런데 작가라는 직업은 나이도 성별도 제한이 없고, 딱히 돈이 그렇게 들지도 않는다. 기껏해야 책 값 정도면 있으면 되고, 그마저도 없으면 얼마든지 도서관에서 빌릴 수 있으며, 무엇보다 돈 없을 때 시간 때우는데 책만 한 것이 없다. 아마 돈으로 할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효율적이고, 싸게 먹히는 게 책인 듯하다. 하지만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이라 해도 글을 쓰는 건 또 다른 문제다. 20권을 읽어도 막상 1장을 써내려 가기가 여간 힘들다. 아는 것은 많지만 나만의 언어로 전달하는 능력은 다르다. 어떻게 글을 쓰는지 레시피를 정해주면 그대로 따라 하면 될 것 같지만, 요리 프로그램의 레시피를 그대로 따라 한다고 해도, 사람에 따라 맛도 달라지고 심지어 주방도 엉망이 될게 분명하다. 누구나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렇다고 아무나 되지도 못한다. 작가는커녕 글을 쓸 수 있는 사람도 드물고, 이걸로 돈 버는 사람은 더 드물다. 


돈이 되지도 않고, 그렇다고 인생이 바뀌지도 않은데 글을 쓰는 사람들은 왜 계속 이 헛짓거리를 이어가려고 할까? 글은 전쟁터에서도 무수히 쓰였다.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던 조지 오웰과 헤밍웨이는 모두 그에 대해 썼다. <카탈로니아 찬가> 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유럽의 역사를 바꾼 스페인 내전이 없었다면 나올 수 없는 작품이었다. 내일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저러한 걸작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그 작가들이 단순히 보상을 위하여 쓴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감옥에서도 포로수용소에도 그 어떤 절망의 순간에서도 글을 쓴다. 어쩌면 글이라는 것은 인간에게 남겨진 마지막 자유라서 그런지 모르겠다. 


정신과 육체가 파괴되고 시대는 변하고, 많은 것은 생기고 사라지고를 반복하지만, 기록에 남겨진 이름들과 수많은 사건들은 아직도 우리에게 살아서 같이 숨을 쉰다. 역사적 사건과 기록들은 교과서에 박제되어 후손들에게 전해지고, 그 속의 영웅과 배신자들은 직접 본 적도 없지만 경외심과 분노를 일으킨다. 종이 박힌 검은색 글자를 보고 말이다. 어떤 사람일지 상상하고, 각색해서 드라마나 영화로 다시 부활해 우리에게 다가온다.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고 한다. 돈으로 산건 버려지기 마련이다. 뜨거웠던 연인도 시들해지고 항상 내 울타리를 지켜줄 것 같은 가족도 서로 미워하다가 사라진다. 죽은 자는 눈을 감지만 살아 있는 자는 눈을 뜨고 그 모습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 기억을 옮기면 글이 된다. 그래서 글을 무섭고 위험하다. 죽지도 않고, 본적도 들은 적도 없지만 마치 옆에서 살아 숨 쉬는 것처럼 느끼기 때문이다. 그것도 독자의 상상 속에서 확대되고 미화돼서 말이다. 히틀러를 모르는 사람이 없고, 유대인의 스토리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들은 언제나 전쟁과 성경의 꼬리표에 등장할 수밖에 없다. 탈레반들도 서슴없이 자살폭탄 테러를 하는 것도 순교하면 천국에 가서 수십 명의 처녀들이 기다린다는 이야기를 믿기 때문이다. 자기소개보다 사람들은 소문을 먼저 듣고 나를 알 듯이 우리가 생각해온 것보다 이야기는 강력하고 무시무시하다.


내가 나의 글을 쓰는 동안 내 속에 있는 진짜 나를 만날 수도 있다. 그가 하고 싶은 얘기 참아 입밖에 꺼낼 수도 없었고, 누구에게 털어놓을 수 없는 고민도 그럴듯한 안전장치가 있는 글을 통해 각색하고 써내려 간다. 이제 글 속의 나는 읽는 사람마다 다른 사람이 된다. 물론 그 사람은 내가 아닌 전혀 다른 사람이다. 


글을 신기하다. 그리고 이야기는 무섭다. 돈도 안 되는 것이 여간 재미있고,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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