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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티 Nov 07. 2022

모두의 달리기 저마다의 달리기

달리는 사람들의 가장 큰 축제 마라톤의 꽃이라는 JTBC 서울 마라톤을 다녀왔다. 오랜 코로나 덕분에 열리지 못했던 한이라도 풀듯이 역대급 참가자와 다양한 볼거리가 가득했고 무엇보다 서울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아찔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얼마 전 이태원 참사의 영향 때문에 최대한 음악도 작게 행사도 작게 진행했지만, 그럼에도 대단한 축제임에는 분명했다. 몇 번의 대회 참가 때문이지 아니면 익숙함인지 아니면 목표하는 기록이 없어서 인지 그렇게 밤잠 못 자고 긴장감이 돌진 않았다. 


하지만 막상 도착하니 엄청난 인파와 어수선한 분위기 페이스 메이커의 동그라미 풍선, 거기에 형형색색 러너들의 신발, 그리고 누구보다 운동에 진심인 철인 형님들의 미소와 처음 풀 마라톤에 참가하는 친구 녀석의 텐션까지 이 모든 게 기분을 끌어올리기에 충분했던 것 같다. 길가에 울려 퍼진 카운트다운을 크게 따라 하고 발걸음을 동동 구르며 알 수 없는 아드레날린을 느끼며 힘차게 뛰어간다. 이른바 대회 '뽕'의 전율을 느끼며 역시나 초반 1km 미터 내가 마치 케냐의 킵초게라도 된 듯 나이키 광고 속의 선수 느낌을 받으면서 들판 위의 양을 사냥하듯이 그렇게 달려간다. 생각보다 몸은 가벼웠고, 기분은 좋았으며 어제 먹은 매운 족발도 나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친구 녀석의 발걸음도 가벼웠고, 무엇보다 열정은 웬만한 프로선수를 뺨칠 정도였다.


서울 도심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경험이 이런 걸까? 누군가는 코스가 어렵고 오르막이 많아져서 기록 내기가 힘들어졌다고 푸념하는 소리도 있었지만, 흰색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물감을 칠해 놓은 것처럼 잡티 하나 없이 깨끗했고, 빌딩 사이 스며들어오는 햇살은  설레기에 충분했다. 굳이 앞에 달리고 있는 포니테일 여성의 뒤꽁무니를 따라가지 않더라도 말이다. 살짝 추웠다고 더워지는 느낌, 적당히 숨이 차면서도 그다지 나쁘지 않은 느낌, 무엇보다 친구랑 크루랑 달리는 모습을 보니까 예전까지 혼자 뛰었던 내 모습이 애잔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역시 이래서 길바닥에 돈 주고 함께 달리는 구나를 새삼 느꼈다. 


하지만 미래는 모르기 때문에 불안하다 했던가? 당연히 골인할 거라는 나의 기대와 다르게 친구 녀석이 20킬로 지점에서 퍼진다. 몇 번의 걷뛰를 반복하면서 있는 파워젤을 몽땅 흡입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버리고 갈까 고민하다 주렁주렁 달고 갔지만 연습이 안 된 녀석의 허벅지와 종아리에게는 완주메달이 허락되지 않았다. 졸지에 남은 20킬로를 혼자 달려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아쉽지만 뭐 어쩌겠나.. 세상에 가장 쓰잘데 없는 게 남 탓하면서 책임을 돌리는 짓거리 아닌가? 다시 속도를 올려 내 페이스로 뛰기 시작했다. 


같이 발맞추어 달릴 때는 편안함과 안정감이 있었다면, 혼자 다시 달리니 쓸쓸함은커녕, 다른 달리기의 맛을 보았다. 역시 미래는 모르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했던가? 생각보다 힘이 남아 있었고, 그렇게 종아리가 땅기지도 않았다. 그리고 이제 옆이 아니라 앞을 저만치 보며 달리니까 묘하다. 초반 페이스 조절 때문인지 마의 구간이라는 35~36킬로 구간도 예전처럼 힘들지 않았다. 요새 꽂혀있는 윤하의 '사건의 지평선'을 들으면서 속도를 올려나갔다. 오래간만에 그것이 왔다. 이른바 '러너스 하이' 이상하리 만큼 다리가 저리고 손과 발이 굳은 느낌이 드는데도 기분은 전혀 불쾌하지가 않았다. 절뚝거리는 고통 속에 웃음을 짓고 있다니.. 역시 행복은 미친 자만 느낄 수 있다는 말인가? 기분이 좋다 전혀 나쁘지 않다. 짜증이 나지 않는다.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 사람들의 표정이 보이고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목이 터져라 응원하는 사람들의 표정도 보이고, 고무장갑을 끼고 물을 따라주는 자원봉사자의 손길, 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이름을 불러주는 길거리의 시민까지, 아 물론 차 막힌다고 소리치는 운전자까지 풍경이 보이기 시작한다. 익숙함 속에서 놓치고 있었던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진짜 당연하게 생각했던 모든 것이 말이다. 생각해보니 도로를 막고 누군가에게 이름 모를 욕을 먹으면서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고 있었던 경찰관 아저씨들의 수고가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자기의 힘듦 때문인지 다른 사람의 고통에 너무나 쉽게 눈을 감는 것 같다. 서브쓰리 주자부터 서브 포 중도포기 주자까지 똑같이 힘들다. 어쩌면 추위에 덜덜 떨면서 응원하는 사람들과 아무런 영광의 순간도 없이 묵묵히 자신의 일을 수행하는 자원봉사자들도 힘들기 매한가지다. 이번 마라톤은 웬일인지 이런 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만큼 여유가 생겨서 인지 아니면 나이가 먹어서인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또 깨달았다. 나의 고통이 누군가에게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음을.. 마찬가지로 남의 고통이 나에게도 아무것도 아닐 수 있음을.. 


너무 먹고살기 힘든 나머지 혹은 경쟁에 너무 휘둘려 살기 때문인지 아니면 뉴스에서 안 좋은 일이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나기 때문인지, 사람들은 "공감"이라는 단어를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것 같다. 내 손톱 안의 가시가 남의 상처보다 더 중요한 일이 느껴지는 건 사실이지만 말이다.


포디엄에 올라가려고 총소리와 함께 발을 구르는 주자, 자신의 기록을 단축시키려는 주자,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주자, 친구와 가족과 함께 축제를 즐기려는 주자, 뛰는 것 자체를 즐기는 주자, 인스타에 #태그가 목적인 주자.. 거기 넘어 달리지는 않지만 우리를 달리게 하기 위에 무대 밖에 있는 많은 사람들.. 여기서 누가 주인공이고 누가 달리는 목적에 가장 부합하는 사람일까? 


예전 같으면 중도 포기한 친구에게 욕을 한 사발 날리고 야유와 비난을 보냈겠지만, 사실 그 친구는 바쁜 회사일과 집안 사정 때문에 훈련을 게을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럴만한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당연히 친구의 열정과 노력은 올림픽 선수와 다를 바가 없었다. 없는 시간을 쪼개서 훈련하고 노력했으니깐 다만, 피지컬과 상황이 달랐을 뿐.. 그래서 달리기의 목적을 묻는 다면 시원하게 대답을 못하겠다. 각자의 사정과 사연은 너무도 다르니까.. 


요즘 것들은 달릴 때 사진이나 찍고, 멘털이 약하다는 어른들의 주장과 뭐하러 저리 죽기 살기로 몸을 망가뜨리면서 뛰나요? 즐기면 되지라고 말하는 젊은것들의 주장이 모두 일리가 있다. 그럼에도 각자의 달리기를 존중하는 "공감"이 조금이나마 남아 있으면 좋겠다. 그렇지 않으면 2만 명이나 되는 사람이 모이지 못할 것이며 갈기갈기 찢어져 각자의 달리기를 한다면 이런 대회는 필히 없어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대회 '뽕'도 없어지지 않을까? 


도착해서 인상을 찡그리는 순간도 잠시, 해냈다는 성취감과 죽지 않고 살아왔다는 안도감이 나를 감싼다. 그리고 사람들이 표정이 보인다. 웃고 있다. 마치 르누아르의 그림처럼 모두 행복하게 말이다. 


다들 달리기의 목적은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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