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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개구리 Mar 05. 2019

아빠는 좋은 사람이었다 :  

저도 제 인생은 처음입니다.

아빠는 좋은 사람이었다.



동네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했고 친척들이나 주변 사람들도 잘 챙기는 편이었다. 그 후한 인심 덕에 우리 집 형편은 힘들었었다고 엄마가 몇 년 전에 나에게 말했다.


1980년대, 당시 구멍가게는 지금의 편의점보다도 더 많은 물건들을 취급했다.

쌀, 야채, 생선에서부터 공산품들까지 생활 전반에 필요한 것들을 파는 곳이었는데, 아버지는 동네 지나가는 아는 사람들에게 그 넉넉한 인심을 보여줬다고 한다.

물건을 사든 안 사든 아는 사람이 지나가면 "아이고 형님", "아이고 누님" 하면서 달려가서 요구르트에 빨대를 꼽아 드렸다고 했다. 물건을 팔 때도 제대로 된 가격을 받아본 적이 없거나 2인분 같은 1인분처럼, 하나를 사더라도 두 개를 주는 그런 개떡 같은 인심이었다고 한다.

엄마의 속이 얼마나 타들어갔을지 미뤄 짐작해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나의 기억 속에 엄마와 아빠의 최초의 직업은 스웨터를 짜는 공장을 운영하는 것이었다. 말이 공장이지 그 당시 우리 집 안방이 공장인 샘,

내 기억으로는 미싱 2대, 사시 2대, 오바로크 1대, 요꼬라는 기계가 2대였다. 이것도 나중에 들었던 내용인데 그 요꼬 기계 1대는 우리 집 소유가 아니라 아빠의 친구에게 그만큼의 공간을 무상으로 자리를 내어주어 개인일을 하도록 해 준 것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우리 아빠는 좋은 사람이었다.

우리 가족을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말이다.


아빠는 술을 정말 좋아하셨는데, 술만 마시고 들어오면 우리 4남매를 세워두고 훈계를 시작했다. 말이 훈계지 술주정이고,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그냥 혼났다. 지금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겠지만 적지 않은 폭력도 있었다. 제일 큰 피해자는 우리 집 장남인 형이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형은 아직도 아빠에 대한 좋은 기억이 없다고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올해로 30년이 흘렀다.

그래도 이런 아빠를 기억할 수 있어서 다행이고, 아빠가 떠나갈 때 슬픔을 느낄 수 없는 나이어서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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