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부부 싸움은 칼로 물베기

by 윤본



스크린샷 2025-10-05 오후 6.49.19.png A quarrel between husband and wife is like cutting water with a knife

부부 간에는 다투더라도 일시적이고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내는, 한국 사람이라면 모두 잘 아는 속담입니다. 저와 아내도 여느 부부들과 마찬가지로 많이 다투고 화해하며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제게는 아내보다 더 많은 다툼이 있었던 사람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바로 첫째 딸입니다. 말하자면 “부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모든 집이 그러하듯 큰아이는 어렸을 때부터 엄마 아빠의 관심과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습니다. 그러나 부부가 맞벌이를 했던 탓에 아주 어린 시절부터 가장 늦게까지 어린이집에 남아 있다가, 선생님들 퇴근 시간에 맞춰 집으로 가는 날이 많았습니다. 제발 엄마가 늦게 데리러 왔으면 좋겠다는 철없는 동생들과 달리, 큰아이는 엄마가 일찍 오는 것이 늘 소원이었습니다. 부모인 저희 역시 미안한 마음이 많아 항상 동생들보다 큰아이를 먼저 생각하고 더 많은 것을 해주려 했습니다. 여행을 가도, 외식을 해도 가장 먼저 큰아이를 배려해 결정했고, 혹시나 자존감이 떨어질까 봐 칭찬도 더 많이 해주려고 애썼습니다. 껌딱지처럼 엄마 곁을 떠나지 않던 아이는 점차 밝아졌고, 성인이 된 지금은 어릴 적의 안쓰러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싱가포르로 가족이 이주했을 때도 가장 힘들 아이가 다름 아닌 큰아이일 거라 생각했습니다. 제법 나이를 먹은 고등학생이 언어가 다른 나라에 와서, 그것도 대학 입시를 앞두고 적응한다는 게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집을 알아볼 때도 큰아이는 혼자 방을 쓰겠다고 고집했고, 덕분에 아버지인 저는 아들과, 아내는 둘째와 방을 쓰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부부가 떨어져 지내야 한다는 사실이 짜증 나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지금 아들과 같은 방을 쓰는 게 너무도 좋습니다.


아이가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기 힘들어하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되었고, 자연스레 아이 방에 가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잠은 잘 자는지, 공부는 하고 있는지, 필요한 건 없는지 수시로 확인하다 보니, 급기야 아이가 제발 방문을 열지 말아 달라고 부탁할 정도가 되었죠. 하지만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술 한잔 하고 들어오는 날이면 더 걱정이 커져 방문을 열어보곤 했고, 그러다 잔소리를 한두마디 거들게 되고, 결국 말싸움이 커져 큰소리를 내는 일도 많아졌습니다.


제 진심과 걱정을 몰라주는 아이가 서운하다 못해 괘씸했고, 아이는 프라이버시를 무시하고 자기 공간을 제집 드나들 듯하는 아빠가 너무도 싫었습니다. 제 입에서는 험한 말이 나오고, 아이는 서러움에 눈물을 흘리며, 결국 아내와의 더 큰 다툼으로 번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럴 거면 뭐하러 여기 와서 이 고생을 사서 하나’ 싶은 자괴감마저 들었죠.


그러던 어느 날, 사건이 터졌습니다. 친구 생일 파티에 다녀온 아이가 술을 마시고 늦게 들어온 것입니다. 싱가포르에서는 만 18세부터 술을 마실 수 있지만, 고등학교 졸업 전까지는 술은 안된다고 누차 말해온 터였습니다. 술에 취해 잠들어 버린 바람에, 걱정된 친구들이 집으로 전화를 하게 되어, 절대 술을 마시지 않겠다던 아이의 거짓말은 들통 났고 저는 머리끝까지 화가 났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아이에게 핸드폰을 집어 던지며 당장 집을 나가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참다 못한 아이는 아빠와는 더 이상 못 살겠다며 혼자 한국에 가겠다고 했고, 아내는 “애 내쫓으면 이혼하고 큰애랑 한국 가겠다”며 맞섰습니다. 순식간에 집안 분위기는 얼어붙었고, 둘째와 막내도 함께 우울해졌습니다.


‘이렇게 이혼하게 되는 걸까?’ 두려움이 밀려왔고, 그래서 더욱 큰애가 미웠습니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배은망덕하게 가정을 산산조각을 내?" 가슴은 분노로 가득찼습니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습니다. 서로에게 상처만 남긴 채 멀어져버린 간극을 어떻게 좁힐 수 있을지 며칠 동안 아내와 고민했습니다 . 그러나 서로 떨어져 지내는것 외에는 뾰족한 답이 없었습니다. 아이가 혼자 쓰던 방은 동생에게 넘기고 엄마와 함께 생활하게 했습니다. 다섯 식구가 둘러앉던 식사도 네 명으로 줄었고, 큰아이는 아내가 따로 밥을 챙겨 먹었습니다. 마주쳐도 서로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습니다.


외출하거나 들어올 때 아이들이 습관적으로 하던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왔습니다”에 큰아이의 목소리는 사라졌습니다. 긴장은 그렇게 서서히 굳어갔고 집에서 웃음소리는 더이상 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술을 마시다 이런 현실이 믿기지 않아 눈물이 났습니다. 내 자식과 남처럼 지내야 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고, 허무하게 끝나버린 관계가 기가 막히고 억장이 무너졌습니다.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로부터 서너달쯤 지났을 무렵이었습니다. 분노도 미움도 어느 정도 옅어졌을 때였죠. 정확한 상황은 기억나지 않지만, 앉아 있던 큰아이가 곁을 지나던 제게 말을 걸었습니다. 특별한 이야기도 아니었고 그저 일상적인 대화였습니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습니다. 저는 어색하고 매우 당황스러웠지만, 무엇보다 조심하고 싶었습니다. 무엇을 물었는지, 뭐라 대답했는지 기억도 안 납니다. 그러나 몹시 흥분되고 기뻤던 순간이었습니다.


이일이 있은 후 큰아이는 가족 식사에도 함께 했고, 아이의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왔습니다”도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다시 가족 안으로 돌아왔습니다. 지금도 저는 아이에게 말을 걸 때 조심하려 합니다. 방에 들어갈 때는 노크를 하려 하고, 세세하게 캐묻는 일도 많이 줄었습니다. 아이 역시 아빠를 존중하려는 모습이 여러 군데에서 느껴집니다. 말투도 한결 부드러워졌고, 대화도 예전과 달리 진지하게 이어집니다. 여전히 아이에게 쓴소리도 합니다. 하지만 예전처럼 상처 주는 방식이 아니라, 진심을 알려주려 노력합니다. 예전에는 화로 맞받아치던 아이도 듣고 넘기는 여유가 생겼습니다.


영원히 끝장나 버릴 것 같던 부녀싸움은 이렇게 회복되었습니다.


Family relationships often bend under the weight of conflict but rarely break. In this essay, I share a deeply personal story of clashing with my eldest daughter during her difficult teenage years.


Our arguments grew so intense that silence and distance filled our home, and for months it seemed the bond was beyond repair.


Yet, one ordinary moment—a casual word at the dinner table—opened the door to reconciliation. From there, trust slowly returned, and our relationship found its balance again. The experience taught me that love within a family, though tested, always seeks a way back toge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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