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꽃이 피면 바람이 불고,
바람이 불면 꽃이 진다

by 윤본


스크린샷 2025-10-26 오후 2.56.54.png When flowers bloom, the wind blows; when the wind blows, flowers fall

"꽃이 피면 바람이 불고, 바람이 불면 꽃이 진다". 동서양의 많은 예술가들이 꽃을 비유해 인생의 중요한 순간들이 매우 덧없음을 표현해 왔습니다. 오늘은 꽃과 같던 내 청춘의 첫사랑, 제대로 피워보지도 못하고 훌쩍 지나가버린 나의 첫사랑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S를 처음 만난 건 고등학교 2학년 시작 무렵이었습니다. 새로운 동네로 이사를 가게 되면서 미사를 드릴 새 성당을 찾아갔습니다. 어느 일요일 아침, 집근처의 한 본당 입구에서 도착하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주보를 나눠주던 그녀를 처음 보게 되었습니다. 하얀 얼굴이 너무 인상적이었습니다. 인사를 건네는 목소리도 듣기 좋았습니다.


처음 가는 성당이라 저는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혼자 한쪽 끝에 앉아 미사 시작을 기다리고 있었죠. 그때 S가 단상에 나와 사회를 보며 미사를 진행하는 것이었습니다. 덕분에 그 시간만큼은 몰래 훔쳐보지 않고, 당당하게 S를 쳐다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만난 S는 제가 열성적으로 성당에 나가던 계기를 만들어 주었죠.


알고 보니 S는 저보다 한 살 어린 고등학교 1학년이었습니다. 내향적인 저와는 달리 학생회 활동을 매우 열심히 하는 활발한 아이였습니다. 저는 S가 어디 사는지 너무 궁금해 몰래 멀찍이 떨어져서 졸졸 따라가본 적도 있었습니다. 학교에서도 공부는 안 하고 늘 S 생각만 하고 지냈습니다. 하루는 친구 녀석이 한번 보여 달라고 하도 졸라 녀석과 함께 무작정 집 앞에 가서 올 때까지 기다린 적도 있었지만 결국 마주치지는 못했었죠. 그렇게 오랜 날이 덧없이 흘러갔습니다. 결국 용기를 못 낸 저는 1년이 넘도록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는 짝사랑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어느덧 저는 고3이 되었습니다. 고3이 되면 기숙사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매일 집에 오가며 바라볼 수 있던 S의 집도 이젠 마음대로 볼 수도 없었습니다. 공부에 집중하려 성당을 쉬는 친구들도 많아졌습니다. 게다가 정신적으로도 고3이 주는 부담감이 높아졌습니다. 이러다 이도 저도 안 되고 뭔가 그냥 다 끝나버릴 것만 같은 불안감이 들었습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을까요. 이 소심한 남학생은 드디어 고백을 하기로 합니다. 하지만 직접 말을 할 용기는 없었죠. 그저 선물과 편지로 마음을 전하기로 생각했습니다.

레코드 가게에서 가장 인기 있다는 카세트테이프를 골랐습니다. 밤새 적은 편지를 넣어 예쁘게 포장을 하였습니다. 바로 "김광석 다시 부르기 1집"입니다. 미사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멀찍이 떨어져 걸으며 타이밍을 보며 마음을 졸였습니다. S가 모퉁이를 돌았을 때 이때다 싶어 선물을 건넸습니다. 하지만 수만 번 연습했던 그 간단한 말 한마디 못 하고 저는 돌아서서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학교로 돌아갔는지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한 주가 지나 S로부터 짧은 쪽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듣고 싶던 음악이었고 선물 너무 고맙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앞으로 좋은 관계로 지내보자는 말도 있었습니다.


요즘 말로 썸 타는 정도였겠지만 마치 연인이라도 생긴 듯 너무 행복하고 감사했습니다. 그래봐야 그저 따로 미사를 함께 보는 게 전부였지만 우리는 몇 번 따로 만나기도 했습니다. 평일 야간 미사는 보통 사람들이 적어 매우 한산합니다. 쑥쓰러워 옆에 나란히 앉지도 못하고 앞뒤로 앉아 미사를 보았습니다. 그러다 S의 미사포가 바스락거리기라도 하면 그 작은 소리까지도 사랑스럽게 느껴지던 순간이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의 싸늘한 밤공기마저도 기분 좋게 느껴지던 그런 나날이었습니다.


한 번은 S로부터 기숙사로 편지를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오빠, 서울로 학교 가면 저를 금방 잊어버리겠죠? 저는 그렇게 쉽게 잊혀지는 사람이 되긴 싫어요"라는 매우 오글거리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널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니. 편지를 품에 안고 행복해하던 기억이 지금도 선합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광주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학교 캠퍼스를 누비는 많은 어여쁜 여학생들은 굳건히 맹세했던 나의 첫사랑까지 어느덧 무뎌지게 만들었습니다. S도 고3이 되면서 많은 부담과 고민들이 생긴 듯했습니다. 정식으로 사귄 사이도 아니어서였을까요, 우리의 강렬했던 썸들도 슬슬 꺼져가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밤 늦은 시간, 공중전화로 S와 통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서로 안부를 묻던 중 갑자기 S의 어머니가 전화를 받으시고는 저에게 '누군데 이 늦은 시간에 통화를 하냐'며 조금 격앙된 목소리로 물어보셨습니다. 너무 갑작스레 발생한 일이라 저는 머뭇머뭇거리다 결국 한마디도 못 하고 전화를 끊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남자답지 못했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습니다. 물밀듯이 느껴지는 수치심에 저는 그 사건 이후 S에게 다시는 연락을 할 수 없었습니다.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자기는 나중에 꼭 수녀님이 될 거라고 말하던 여고생 S는, 시간이 훌쩍 흘러 안부를 물었을 때 여전히 주님을 벗 삼아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다고 전해왔습니다. 이후 결혼도 하고 아이를 낳고 또 선생님이 되어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고도 전해 들었습니다.


저의 첫사랑은 금방 피었다 지는 꽃처럼 매우 짧았습니다. 그러나 매우 강렬했고 또 설렜던 순간이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면서, 그 설렘도 기대감도 자연스럽게 그 시절에 남겨두게 됩니다. 처음에는 무척 아쉬웠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쉬움보다는 미소가 지어집니다.


그 시절의 서툴렀던 나를 기억하는 것이 행복합니다.



"When flowers bloom, the wind blows; when the wind blows, flowers fall" is a Korean proverb capturing life's fleeting precious moments. This essay recounts a tender first love from high school in Gwangju, South Korea.


The narrator, a shy eleventh-grader, falls for S, a vibrant younger student he meets at church. After a year of silent yearning, he finally confesses through a mixtape—Kim Gwang-seok's beloved album—and a handwritten letter. Their tentative romance blooms through evening masses and secret letters, but gradually fades when he leaves for university in Seoul.


A late-night phone call interrupted by S's mother becomes the painful turning point. Like flowers scattered by spring wind, their brief love remains a bittersweet memory of youthful innocence and awkward cour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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