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하늘이 내린 복

A Blessing from Heaven

by 윤본
스크린샷 2026-02-01 오후 8.16.00.png Heaven-Sent Blessing

우연한 인연이 인생의 전환점이 되거나,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음에도 좋은 결과가 나왔을 때 사람들은 보통 이렇게 말을 합니다. 꿈에 나온 번호로 로또에 당첨되었다는 이도 있고,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거머쥔 선수들도 하늘이 그 운을 점지해 주었다고 입을 모으기도 합니다.

제 인생에도 이런 우연한 기회가 몇 번 있었습니다. 그런 기회들로 시작해 지금까지 나름 안정되게 살아왔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며 살아가고 있으니, 제게도 분명 하늘이 내린 복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2000년 가을쯤으로 기억합니다. 당시는 대한민국을 얼어붙게 만들었던 IMF가 어느 정도 회복되 가는 시기였고, 취업 시장도 차츰 나아지고 있던 때였습니다.

대학 졸업반이던 저는 다른 학생들처럼 취업 준비에 한창 열을 올리고 있었죠. 오랜만에 신입 사원을 선발하는 대기업에 지원하기도 했고, 모두에게 꿈의 직장이라는 은행에도 도전해 보았습니다. 늦은 밤까지 이력서를 다듬고 자기소개서를 고치는 일이 매일 같이 반복되었습니다. 면접이라도 잡히면 필요한 자료들도 찾고 또 찾아 준비하며, 졸업 후 맞이할 사회생활을 조금이라도 안전하게 시작하고 싶어 그시절 하루 하루를 참 열심히 살아 갔었죠.


하지만 현실은 많이 달랐습니다. 경기가 좋아졌으니 취업이 어렵지 않을 거라 했던 기대는 줄줄이 들려오는 낙방 소식에 어느덧 불안으로 바뀌어 갔고, 그 불안은 어느덧 포기로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 눈을 좀 낮추자. 꼭 삼성이나 LG가 정답은 아니잖아. 연봉도 좀더 낮추고 회사들을 더 넓게 보면 내가 일할 곳은 반드시 있을 거야.'


마음이 편해진 걸까요, 그새 생각이 안이해진 걸까요? 매일 밤 열심이던 모습은 점차 사라지고, 삼삼오오 친구들과 모여 치킨에 소주 한잔하는 일이 잦아 졌습니다. 당시 학교 기숙사에 지내고 있었는데, 먼저 취업에 성공해 나간 친구들도 있었지만 저처럼 아직 직장을 잡지 못하고 여전히 취업을 준비하는 학생들도 많았습니다. 그들은 저녁마다 한 방에 모여 배달 음식에 소주도 한잔씩 하며 신세한탄도 하고 또 취업 정보도 공유하곤 했었죠


저 역시 늘 함께 모이던 대여섯 명의 친구들 무리가 있었습니다. 같이 수업도 들으러 가고, 도서관도 같이 가고, 다른 취준생들처럼 가끔 저녁에는 한 방에 모여 술 한잔하는 그런 친구들이었죠.

그러던 어느 날, 밤 열시쯤 되었을까요. 무리들은 여느 때처럼 출출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치킨에 소주 한잔 하기로 했는데, 마침 한 친구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오겠지 싶어서 우선 우리는 음식 배달을 시켰고, 몇 녀석은 또 술을 사러 밖에 다녀왔습니다.


안보이던 녀석이, 어련히 올까 싶어 데리러 가는 게 사실 귀찮았지만, 밖에 나가는 것보다는 덜 움직이니 저는 선뜻 친구를 데리러 방을 나섰습니다. 3층 친구 방에 도착해 보니 룸메이트는 보이지 않았고, 녀석 혼자 책상에 앉아서 무언가 열심히 하고 있었습니다.


"임마, 혼자 뭐 하냐? 애들이 치킨 시켰어. 내려가서 같이 소주 한잔 하자."


갑자기 온 저를 보고 무척 당황해하는 친구 모습에, 더욱 궁금해진 저는 "뭐 하는데?"라고 슬쩍 책상을 보게 되었죠. 입사 원서를 작성하고 있던 모양이었습니다. 순간 너무 미안하고 당황해서 "앗, 미안해. 내가 방해했네. 얼른 다 쓰고 내려와."라고 하며 방을 바로 나왔습니다. 친구도 좀 민망했는지 먹고 와서 쓰면 된다며 절 따라 방을 나섰죠


어디 지원하냐며 저는 별 생각 없이 녀석에게 물었습니다. 친구 말로는 한 외국계 회사 신입사원 공채가 있는데, 마감이 며칠 안 남아서 얼른 지원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소주에 치킨 먹을 생각에 대수롭지 않게 흘렸고, 여느 때와 같이 또 술에 취해 그렇게 그 밤을 흘려 보냈습니다.


다음 날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리만큼 어제 일이 자꾸 생각나는 겁니다. 외국계라니. 그 친구가 물론 공부도 잘하고 항상 똑바른 녀석이긴 했지만, 당시 외국계 회사들은 경력직 위주로 선발하는 것이 관행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사실 제 관심 밖의 영역이기도 했구요.


그런데 친구가 말한 대로 그 회사의 홈페이지에는 '신입공채'라는 네 글자가 떡하니 헤드라인에 박혀 있었고, 모집 요강도 국내 회사들의 공채 요건과 크게 다를 것이 없어 보였습니다. 사실 지원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던 거죠. 시간이 며칠 안 남아 부랴부랴 준비를 했고 결국 저도 그 회사에 지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 친구와 저 말고도 몇몇 다른 선배들도 이 회사에 함께 지원을 했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다행히 친구와 저는 모두 서류 전형에 합격했습니다. 며칠 뒤 첫 번째 면접을 보러 가는 길에 친구를 마주쳤죠. 서로 약간 어색했지만 웃으면서 같이 붙자며 서로에게 응원을 해주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친구는 첫 번째 면접에서 떨어지고 말았죠. 그리고 며칠 뒤 치러진 2차 면접에 저와 다른 선배가 함께 올라갔지만 결국 선배도 면접을 통과하지 못했고, 운이 좋게도 저는 최종까지 합격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우연에서 시작해 우여곡절 끝 입사한 첫 회사에서 만 12년을 근무했습니다. 그 이후로 현재 회사까지 이직을 네 번 더 했구요.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공교롭게 모두 외국계 기업들이었습니다.

여전히 유창하게 영어를 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이들처럼 경력으로 시작한 것도 아니었지만, 그렇게 시작한 사회 생활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을 하고 세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20년을 넘게 살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친구가 못 이기는 척 알려줬던 그 시절 그 채용 정보가 어쩌면 제게는 하늘이 점지한 복이었던 모양입니다. 이미 오래전 연락이 끊겨 지금은 연락이 닿지 않는 그 친구가 오늘따라 정말 고맙게 느껴집니다.


"Haneul-i Naerin Bok" (Heaven-Sent Blessing) is a Korean saying used when an unexpected opportunity transforms one's life. In this essay, the author recalls a pivotal moment during the difficult job-hunting season of 2000, shortly after Korea's IMF crisis. While casually drinking with friends at his dormitory, he stumbled upon a classmate preparing an application for a multinational company—rare employers of fresh graduates at the time. This chance encounter led to his first job, a twelve-year career, and eventually a stable life with three children. The essay reflects on how seemingly random moments, combined with timely effort, can become the turning points we later recognize as blessings from above.

keyword
작가의 이전글30. 가는말이 고와야 오는말이 곱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