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irst Time is Hard, The Second Time is Easy
처음 시작하는 일은 무엇이든 어렵고 생경하기 마련입니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서툴러도 한 번 경험하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익숙해져서 점점 쉬워집니다. 이는 우리 일상에서 매우 자주 사용되는 말입니다. 새로운 도전을 앞둔 사람들에게 '일단 시작해보라'는 의미로 격려와 응원을 담아 하는 말이기도 하죠. 사람마다 각자의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말이지만, 저에게도 이와 비슷한 경험이 하나 있어 이야기를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지난 이야기에서 말씀드렸듯이 저희는 아내와 두 딸, 그리고 막내 아들이 함께 사는 5인 가족입니다. 매일매일이 시끌시끌하고 우당탕탕,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죠. 저는 아이들이 어릴 적부터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좋아 가까운 곳으로 여행이며 캠핑을 자주 다녔습니다. 10여 년 전쯤, 저는 나름대로 이리저리 다니며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직장동료가 가족과 유럽여행을 가기 위해 연말에 긴 휴가를 내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는 매우 행복해 보였고, 다녀와서 보여준 사진에서도 즐거움이 가득 느껴졌습니다. 솔직히 너무 부러웠습니다. 눈치 보지 않고 장기간 휴가를 낼 수 있는 그의 위치(?)도, 여행 경비를 감당할 수 있는 재력(?)또한 모두 부러웠죠. 저는 그동안 저축한 것도 많지 않았고, 그저 매달 월급으로 살아가는 평범한 직장인이었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쑥쑥 커가는 아이들을 키우는 데 학원비는 계속 늘어나고, 먹는 것은 또 왜 그리 많은지, 유럽여행이란 언감생심 꿈도 못 꾸던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20대 시절 운 좋게 다녀온 유럽의 경험이 제겐 너무나 인상적이었어서, 할 수만 있다면 내 아이들에게도 반드시 그 경험을 꼭 하게 해주고는 싶었습니다. 당시에는 한 기업인의 자서전 제목처럼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는 말이 유행했습니다. 그저 한 번의 여행이었지만, 제게는 그만큼 특별한 경험이었으니까요
한참 시간이 흘러 우리 가족은 서울에서 싱가포르로 삶의 터전을 옮겼습니다. 이주한 지 2년째 되던 해, 저도 아이들도 팬데믹으로 하루하루가 무척 답답하던 시절이었죠. 문득 이 기회에 가족과 유럽여행을 가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통장에 당장은 여유가 조금 있는 것 같고, 몇 개월 뒤면 실적 보너스도 들어올 터이니 '될 것도 같다'는 철없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갔습니다. 아내는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우리가 그럴 돈이 어디 있어?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니야?"라며 계속 말렸지만, 한번 생긴 마음은 쉽사리 사그라들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이 알다시피 싱가포르의 생활은 높은 물가 탓에 지금 생각해도 사실 무모한 결정이었습니다. 갑자기 치솟은 렌트비에 아이들 학비만 해도 매달 꽤 많은 돈이 통장에서 빠져나갔고, 몇 개월 후를 미리 대비하지 않고는 살아가기가 녹록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현실을 알면서도 한번 유럽에 꽂힌 제 마음은 급기야 비행기 표를 검색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마침 저가 항공에서 괜찮은 가격의 베를린행 표를 발견했습니다. 취소나 변경 시 수수료가 꽤 드는 표였지만 '에라 모르겠다' 하고 결제해버렸죠. 아내에게 적지 않은 핀잔을 들었지만, 그때가 7월쯤이었으니 여행을 떠나는 12월 말까지 우리 집 식탁에서는 여행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어느 도시로 갈지, 호텔은 어디서 묵을지, 또 어디를 둘러볼지, 깔깔대며 즐거운 계획을 세웠죠. 걱정 가득하던 아내의 얼굴도 여행을 준비하면서 점점 기대와 즐거움으로 바뀌어갔고, 그렇게 우리는 달랑 비행기 표 하나로 행복해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여행할 도시를 확정하고, 하나하나 방문할 관광지 동선과 이동 수단 등 세부 일정을 준비해 나갔습니다. 해본 적이 없어서 티켓팅이며 검색이며 매우 서툴렀지만, 그것조차 재미있었습니다. 저를 제외한 가족들은 유럽 경험도 없고 아이들도 아내도 아직 영어가 서툴렀지만, 웃으면서 투닥거리며 다가오는 여행 준비를 해나갔습니다. 드디어 베를린-프라하-파리-런던을 여행하는 대망의 2주 일정이 완성되었습니다. 유럽의 소매치기와 도둑 이야기에 부모인 우리부터 겁을 잔뜩 먹었고, 저가 항공이라 기내식도 없는 12시간의 비행이 걱정되었지만, 그래도 가족들의 밝고 즐거운 얼굴이 기억에 선명합니다. 물론 처음 하는 여행이다 보니 짧은 시간에도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싱가포르로 돌아와 집으로 오는 택시 안에서, 무거운 눈꺼풀 너머로 들리는 아이들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에 피곤이 금세 사라졌고, 이 여행이 정말 잘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2년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큰아이는 어느덧 대학 입시를 치렀고, 둘째도 고등학교 입시를 마쳤습니다. 아이들이 시험 준비에 한창이던 2024년 여름, 아마 그때도 7, 8월경으로 기억합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아이들도 점점 더 커가니 겨울쯤에는 가족여행을 한번 다녀와야겠다. 어쩌면 지금 못 가면 다 함께 갈 기회가 많지 않을지도 모르잖아.' 어느 날 저녁 식사 시간에 가족들과 이야기를 나눠 보았습니다. “올 겨울에 발리나 방콕 같은 가까운 데 여행 한번 다녀오는 게 어떨까?" 하지만 기대했던 제 마음과 달리 아내와 아이들의 반응은 생각보다 시큰둥했습니다. "동남아에 살고 있는데 굳이 왜 또 동남아를 가야 하냐"는 반응이었죠. 이해는 갔습니다. 아이들과 아내는 우리가 살고 있는 곳과는 다른, 좀 더 이국적인 곳을 바랐던 거죠. 호주나 미국, 아니면 지난번에 갔었던 유럽처럼 아시아인들보다는 서양인들이 많은 그런 곳 말입니다.
하는 수 없이 저는 또 열심히 비행기 표를 찾았습니다. 먼저 호주 도시들을 알아보니, 생각보다 항공권 가격이 꽤 나갔습니다. '어라? 이럴 거면 차라리 유럽을 한 번 더 가볼까?' 호주는 나중에 아이들이 갈 기회가 있을 것 같고, 지난번에 못 가본 유럽의 다른 곳들을 둘러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제 마음은 슬슬 그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한 번도 다녀왔는데 두 번은 못 가겠어? 좀 아껴서 다녀오면 못할 것도 없겠지.' 이런 생각이 들었고, 결국 중국을 경유하는 스무 시간이 넘는 비행기 왕복 표를 결제했습니다. 생각했던 것과 달리 경유해서 가는 여행은 몸이 많이 힘들었습니다. 다음에는 비용을 좀 들이더라도 가능하면 직항을 타는 게 여러모로 낫다는 교훈도 얻을수 있었죠. 첫 번째 여행만큼 들뜬 마음은 아니었지만, 비행기 티켓을 결제하고 다시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방문할 도시와 관광지 등을 하나하나 정해나갔습니다. 2년전 짧은 여행이었지만 이전 경험 덕분인지 신기하게도 가족 모두가 꽤 여유 있게 준비했습니다. 첫 여행처럼 그렇게 긴장 되지도 않았고, 도시 간 이동하는 기차나 비행편을 살피는 것도 능숙해졌으며, 각 도시의 특징도 여유 있게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이런저런 국내외 사이트를 찾아보며 적당히 거를 건 거르고 취할 건 취하고, 이제는 나름의 여행 노하우가 생겼다고 할까요? 전보다는 한결 수월하게 여행 준비를 할 수 있었습니다.
여행지에서도 늘 생기기 마련인 돌발 변수들이 있었습니다. 기차나 버스가 제시간에 오지 않아 다음 일정에 차질이 생기거나, 예약한 식당이 구글 정보와 달리 문을 닫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돌발 상황에도 어른이나 아이들이나 당황하지 않고 여유 있게 대처해 나갔습니다. 첫 번째 여행을 했을 때만 해도 "언제 다시 올지 모르니 가능한 한 많은 곳을 돌아보아야 해"라는 마음가짐이었습니다. 반면 두 번째 여행은 '가능한 한 여유 있게, 무조건 여유 있게 돌아보자’주의였죠. 첫 번째 유럽여행이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관광지를 돌고, 박물관을 가고, 맛집을 찾아다니다가 밤이면 피곤에 쓰러져 잠들던 여행이었다면, 이번에는 많이 달랐습니다. 도시별로 일정을 하루씩 더 늘리고, 하루에 한 가지 일정만 계획했습니다. 그리고 반나절은 자유 시간으로 비워두었죠. 이런 여유 덕분에 도시를 더 넓은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느즈막이 일어나 도시를 천천히 거닐거나, 그때그때 하고 싶은 것들을 즉흥적으로 즐기기도 했습니다. 컨디션이 떨어지면 숙소에서 자유롭게 쉬기도 했고요. 결과적으로 아주 좋았습니다. 아이들도 좋은 컨디션으로 유럽의 도시들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죠.
두 번째 여행은 좀 더 욕심을 내어 3주 정도로 다녀왔습니다. 여유를 테마로 정했기 때문일까요? 밀라노-로마-아테네-암스테르담-루체른으로 다녀온 이번 여행은 여러모로 가족들에게 익숙하고 편안한 여행이 되었습니다. 재미있었던 것은 저와 아내는 그새 나이가 들어 체력이 부족해진 반면, 아이들은 2년 사이 몸집이 더욱 커지고 나름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전보다 더욱 의젓해지고, 부모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세상 경험도 많아졌으며, 영어도 제법 하게 되어서 여행 내내 아이들을 챙겨야 한다는 느낌보다는 친구와 함께 여행하는 기분으로 즐겁게 다녀왔습니다. 차를 렌트할 때나, 레스토랑에서 주문한 내용이 달라 옥신각신 할 때, 또 공항 직원들이 익숙지 않은 질문을 갑자기 할 때, 옆에서 든든하게 아빠 엄마를 도와주던 아이들의 모습이 너무 대견하고 뿌듯했습니다.
이런 가족여행은 시간과 비용이 맞아떨어질 때 비로소 가능합니다. 어떻게든 시간은 만들 수 있어도 경비를 충당하지 못하거나, 회사 사정상 휴가를 내지 못해 장기 가족여행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죠. 어쩌면 제가 팬데믹 시절에 다녀올 수 있었던 것이나, 싱가포르에 살다 보니 휴가를 내기가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것은 행운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싱가포르도 결국 사람 사는 곳입니다. 적지 않은 비용을 쓰는 것도, 장기간 휴가를 내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죠. 시차 때문이기도 했지만, 두 번째 여행 때는 이른 새벽에 일어나 아침까지 업무를 처리해야 했으니까요. 두 번의 여행에 들어간 비용 역시 어림잡아 보면 근사한 세단 한 대를 살 정도였습니다. 처음에는 이 비용이 상당히 아깝고, '이렇게 써도 될까?' 하는 걱정도 컸습니다. 하지만 뭔가를 하려고 마음먹으면 어떻게든 명분과 대안을 찾게 되더군요. 결과적으로 저와 아내는 이 여행이, 비용적인 부담도 또 회사에서의 눈치까지도 모두 상쇄할 만큼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또다시 언제 가족이 모두 유럽을 다녀올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제 저희 가족에게 유럽은 한결 친근해진 곳이 되었습니다. 여건이 허락하면 편하게 다녀 올 수 있는 여행지가 된 것이죠. 두 번의 여행을 통해 훌쩍 자라버린 아이들의 모습은, 변해가는 세상이 조금씩 어려워지는 부모에게도 큰 안심이 되기도 했구요.
어떤 사람들에게는 쉬운 일이고 아무것도 아닐 수 있지만, 제 기준에서는 세 아이들을 몽땅 데리고 유럽을 장기간 다녀오는 것은 매우 쉽지 않았습니다. 그것도 두 번이나요. 돌이켜보면 처음 시작은 마음먹은 것이 8할이었습니다. 저지르면 되었었죠. 이후에 생기는 일들은 닥치면 하나 하나 해결했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부터는 점점 꾀가 생기고 익숙해집니다. 쉽게 대안이 찾아지고 진행할 명분이 찾아지지요. 하기 전에는 알 수 없었던, 도움받을 수 있는 방법들이 쉽게 보이기 시작하고, 무엇보다 주변의 사람들이 나 자신도 모르게 크게 자라 있었습니다. 그렇게 성장한 그들이 나를 다시 돕고 있구요.
제 기억 속의 가족여행을 돌아보면, 여행이 즐거웠던 이유가 목적지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유럽을 가고 미국을 가고, 나중에 세상이 더욱 좋아져서 달나라를 가고 우주여행을 한다 해도 여행이 즐거운 이유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하루 온종일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다는 것일 겁니다. 돌이켜보면 유럽 말고도 국내외 많은 곳을 가족과 함께 다녔습니다. 그런데 기억 속의 행복한 순간들은 늘 같이 웃고, 떠들고, 먹고, 뛰놀았던 시간들입니다. 어딜 가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제가 그랬듯이 아이들이 자라나면서 부모는 아이들과 대화하는 것이 어려워지고 가끔은 함께 하는 시간이 불편해 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장기간 함께 여행을 하게 되면, 부모도 아이를 배려하고 아이들도 부모를 맞춰가며, 어떻게 하면 하루하루가 행복한 시간이 될 수 있는지 스스로 깨우치게 됩니다. 당장은 아니지만 저는 또 가족여행을 준비하려고 합니다. 비싼 유럽이 아닌, 어쩌면 평범한 서울 나들이라도 좋습니다. 더욱 듬직해진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새로운 추억을 또 만들어 보려구요. 가족 간에 서로를 존중하고, 저도 변하고 또 아이들도 변하고, 이러한 서로의 배려가 지금처럼 점점 자연스러워지다 보면 한 번 두 번이 아닌 열 번 스무 번의 즐거운 경험을 우리 가족은 계속 이어갈 수 있겠죠. 더욱 편안하게 그리고 익숙하게 그렇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