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랴

A Sparrow Cannot Pass by a Mill

by 윤본

누구에게나 좋아하는 것이 한 가지쯤은 있습니다. 단순히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듣기만 해도 보기만 해도 행복해지는 그런 것 말입니다. 이 속담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함을 일컫는 속담입니다. 어떨 땐 자기에게 이익이 되기만 하면 절대 지나치지 않는 욕심 많은 사람을 비꼬는 말로도 쓰이기도 하죠. 지금은 주변에 많이 보이지 않지만 예로부터 방앗간은 곡식을 찧거나 빻는 곳입니다. 곡식을 좋아하는 참새가 방앗간 주변을 떠나지 못하고, 어쩌다 흘러 나온 곡식이라도 주워 먹을까 하는 애틋한 마음을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 가족들에게도 참새처럼 각자 죽고 못 사는 것들이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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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중년 남성들처럼 저도 역시 술을 좋아합니다. 대학 시절부터 술을 즐겼고, 다양한 술을 가까이 하며 살아 왔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술자리의 좋은 분위기 때문에 술을 즐긴다고 하지만, 저는 술맛 자체가 좋았습니다. 각종 술들의 특유의 맛들도, 그와 곁들이는 안주도 또 가끔 편한 사람들과는 당연히 함께하는 시간도 모두 좋았죠. 다행인지 불행인지 20년 넘게 함께한 아내도 술을 즐기는 편입니다. 다만 이런 저런 술을 안가리는 저와 달리 아내는 맥주만 좋아하는 편입니다. 술 고유의 맛을 즐긴다기 보다는 냉장고에서 갓 꺼낸 그 청량함을 즐기는 편입니다.

처음 술을 배웠을 때는 다른 사람들처럼 저도 소주, 맥주로 시작했습니다. 밤새도록 마시고 깨질 듯한 두통과 쓰린 속으로 며칠을 고생하기도 했고, 지난밤 기억이 안나 다음날 초조하고 답답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와인도 즐기고, 팬데믹 시기에는 유행하던 위스키도 마셨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나이가 들수록 술이 깨고 몸이 회복되는 시간이 점점 더뎌지는 걸 느낍니다. 사실 아버지가 이른 나이에 돌아가신 것도 결국은 술 때문이었기에, 어머니의 잔소리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갈수록 너무 좋아하는 술이지만 언제나 이젠 조금 줄여야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래도 마트에 갈 때면 늘 와인 코너에서 발걸음이 멈춰집니다. '오늘만 마지막 한 잔?'이라는 유혹이 매일 밤 손짓하지만, 언제나 떨치기는 쉽지 않습니다. 마침 최근 치과 치료로 자의반 타의반 금주를 하고 있습니다. 술을 마실 때의 몽롱하고 야릇한 기분은 더 이상 느낄 수 없지만, 숙취없이 상쾌하게 맞이하는 아침의 기분도 나쁘지 않아서 이번 기회에 한번 익숙해져 보려고 합니다.


연애 시절, 아내에게 별명이 뭐냐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여러 별명들을 얘기했지만 그중 '빵순이'라고 했던게 기억이 납니다. 어릴 적부터 빵을 너무 좋아해서 가족이나 친구들이 붙여 준 별명이라고 했습니다. 아내는 저와 달리 음식을 적극적으로 탐하는 스타일이 아닙니다. 제가 어릴 때부터 식탐이 있어 맛있는 음식을 보면 정신을 못 차렸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아내는 늘 가족들을 먼저 챙기고 자신은 나중에 아주 조금만 먹는 스타일이죠.

그럼에도 가끔 아내를 보면 혼자 앉아서 커피와 빵 조각을 즐기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카스테라나 쿠키 같은 작은 빵 조각이지만, 그 시간의 여유를 매우 즐겨하는 듯 보이고 작은 빵조각에도 충분히 만족하는 듯합니다. 장을 보고 나면 늘 마트 옆 빵집에 들르는 것도 아내의 오래된 습관입니다. 베이커리에 취미가 있는 둘째는 집에서 종종 쿠키나 빵을 굽습니다. 그래서 몇 년 전 아이 생일 선물로 오븐을 선물하기도 했었죠. 어쩌다 아이가 집에서 빵이나 쿠키를 구울 때면 집 안가득 퍼지는 고소한 빵 냄새를 아내는 무척 사랑합니다. 평소와는 다르게 아이에게 이런 빵, 저런 빵을 해달라고 주문하기도 하고, 갓 구운 빵을 첫 번째로 맛보는 것도, 남은 빵을 마지막까지 맛있게 먹는 것도 모두 아내입니다.

이번 속담을 아내에게 말했더니,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은 '빵'이라고 합니다. 빵집에서 퍼져 나오는 갓 구운 빵 냄새를 맡으면 발걸음이 저절로 그리로 향한다나 어쩐다나. 마치 참새가 방앗간으로 향하는 것처럼요.


큰아이를 떠올리면 두 가지가 생각납니다. 바로 스테이크와 스타벅스입니다. 큰아이는 식당에서도 늘 스테이크를 즐기는 편이고, 집에서도 제가 구워주는 스테이크를 많이 좋아합니다. 야채 등과 같이 곁들이는 가니쉬는 별로 즐기지는 않고 고기 자체를 즐기는 편입니다. 제가 미디움이나 웰던처럼 그래도 조금은 익힌 고기를 선호하는 것과 달리, 큰아이는 레어에 가까운 미디움 레어를 즐깁니다.

집에서 여러 번 스테이크를 구워보면서 이제는 맛있는 고기를 고르는 것부터 원하는 익힘 정도로 굽는 것까지 제법 익숙해졌습니다. 덜 익은 듯한 붉은빛의 레어 스테이크는 제게는 솔직히 아직 거부감이 들지만, 맛있게 먹는 아이를 보면 진정한 고기 마니아구나 싶기도 합니다.

큰아이가 좋아하는 또 다른 하나는 스타벅스입니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계절마다 즐겨 마시는 메뉴만 바뀔 뿐, 아이는 스타벅스 가는 것을 매우 좋아합니다. 요즘 아이들은 스타벅스 같은 오픈된 공간이나, 비슷한 카페에서 공부하는 것을 즐기는 편입니다. 저기서 공부가 될까 처음에는 이해하기 쉽지 않았지만 아침 일찍 가서 자리를 잡고 커피를 시키곤, 자기만의 루틴대로 공부하며 하루를 보냅니다. 요즈음의 스타벅스는 그들에게 커피나 음료를 마시는 단순한 카페가 아닌, 나름의 질서가 있는 백색소음속에서 자기들만의 다양한 목적을 즐기는 특별한 공간인 듯합니다.

어릴 때는 주로 초콜릿 음료를 즐겼습니다. 요즘은 아이스 바닐라 라떼를 즐겨 마시는 것 같구요. 최근 유럽 여행에서도 '1일 1스벅'을 외치며 도시마다 스타벅스를 찾아다녔죠. 근처에 매장이 없으면 실망하다가도 우연히 발견하기라도 하면 대단한것을 발견한 마냥 매우 행복해 했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큰아이에게 스타벅스는 그야말로 지나칠 수 없는 그녀만의 방앗간임이 분명합니다.


둘째는 어릴 때부터 과일을 좋아하기로 유명했습니다. 작은 입으로 오물오물 과일을 열심히 먹는 모습은 보는 사람마다 미소 짓게 만들었죠. 나이가 들어서도 과일만 보면 눈이 반짝이는 둘째의 식성은 여전히 변함이 없습니다.

아내가 마트에서 사 오는 샤인머스캣, 수박, 토마토는 대부분 둘째의 몫입니다. 신기하게도 우리 가족 중 둘째를 제외하고는 과일을 특별히 즐기는 사람이 없거든요. 둘째는 과일만으로도 끼니를 때우는 일도 많고, 가족 모두가 함께 모여 식사를 할 때에도 식사를 마치면 꼭 과일을 찾습니다. 막 밥을 먹어서 배가 충분히 찼을 텐데도 참 신기합니다. 둘째 방에 가면 늘 포도나 토마토가 가득 담긴 그릇이 있습니다. 그리고 늘 그렇듯이 오물거리며 과일을 집어먹고 있는 아이 모습을 자주 볼수 있죠. 너무 과일만 많이 먹는것 같아 어쩌다 핀잔이라도 줄 때면, "아빠, 나는 과일 배가 따로 있나 봐. 아무리 밥을 먹어도 과일은 꼭 먹어야 해. 과일 없이는 살 수가 없어"라며 능청스럽게 웃어넘깁니다.

마트에 갈 때면, 제가 와인 코너에서 한참을 서성이듯, 둘째는 과일 코너에서 이것저것 고르느라 시간을 보냅니다. 과일 값이 만만치 않아 고르기 주저할 때도 있지만, 와구 와구 잘 먹는 모습을 보면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어느 날은 언젠가 집 냉장고에 아내와 장볼때는 없었던 커다란 수박 한덩이가 있는 것을 아내와 발견한 적이 있었죠. 알고보니 녀석이 방과후에 갑자기 수박이 너무 먹고 싶어 마트에 들러 수박을 사왔다고 합니다. 고등학생 여자아이가 아이스크림도 아니고 초콜릿도 아닌 수박이라니, 이런 모습을 보면 이 녀석이 얼마나 과일을 사랑하는지 새삼 실감하게 됩니다.


다른 아이들과 달리 워낙에 무던한 성격의 막내에게 '너에게 참새의 방앗간'이 무엇인지 물어보았습니다. 의외로 단번에 맥도널드라고 대답하더군요. 남자아이들이 햄버거를 좋아하는 건 흔한 일이지만, 막내의 맥도널드 사랑은 사뭇 다릅니다.

저희 부부는 마트에 갈 때 종종 막내를 데리고 가려고 합니다. 부부 모두 아들과 이런저런 실없는 이야기를 나누며 장을 보는 걸 좋아하거든요. 녀석은 늘 맥도널드 햄버거를 사 주면 따라가겠다고 했고, 한번 두번 반복이 되면서 맥도널드는 어느새 아이의 최애 음식이 되었습니다. 학교에서 먹는 점심이 애매한지, 수업이 끝나면 친구와 함께 먹고 오기도 하고, 또는 혼자서라도 맥도널드에 들러 햄버거를 먹는 모습을 종종 봅니다. 아내는 녀석이 패스트푸드를 자주 먹는 것이 걱정되어 방학 때는 맥도널드 금지령을 내리기도 했지만, 참새가 방앗간을 못 끊고 서성이듯이 아이의 눈길은 자꾸만 그곳으로 향합니다.

아내가 외출하거나 집에 다른 가족들이 늦는 경우 저는 가끔 아들과 저녁을 해결해야 합니다. 집에서 요리를 하기는 귀찮아서 간만에 밖에서 오붓하게 고기라도 구워먹으려 하거나, 또 다른 비싸고 좋은 식당에 데리고 가려고 해도 녀석은 맥도널드 햄버거가 가장 좋다고 합니다. 패스트 푸드가 건강에 좋지 않은 건 잘 알려진 사실이라 썩 내키지는 않지만, 또 맛있게 먹으면 만족 해하는 모습을 보면 '그래, 산해 진미가 무슨 상관이야 자기 좋아하는 게 보약이지'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하죠. 한국과 싱가포르의 맥도널드 메뉴는 조금씩 다릅니다. 아이가 특히 좋아하는 건 싱가포르의 맥스파이시 버거입니다. 다른 곳의 메뉴를 먹어봐도 이 메뉴만 한 게 없다며, 지금도 입맛을 다십니다.


이렇듯 우리 가족도 저마다의 취향이 매우 다릅니다. 둘째는 과일을 좋아하지만 다른 가족들은 그렇지 않고, 막내는 점심에 햄버거 먹자고 하면 환호성을 지르지만 아내는 전혀 관심 없는 메뉴입니다. 재미있게도 우리 모두 각자만의 방앗간이 있네요. 생각해보면 이렇게 좋아하는 것 하나 정도 있다는 건 어쩌면 큰 행운일지도 모릅니다.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에서 삶의 재미를 찾지 못해 무료함을 느끼는 사람들도 주변에 많으니까요. '소확행'이라는 말이 유행하는 요즘, 햄버거 하나에도 함박웃음 짓는 아이를 보면 어쩌면 다행이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나만의 방앗간이 꼭 먹을 것에만 한정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운동하는 헬스 클럽이나 책 읽는 도서관처럼, 삶에서 또다른 즐거움과 만족을 주는 건강한 나만의 방앗간들을 한두 개 쯤 가지고 살아간다면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우리 삶이 더욱 재미있어 지고 또 풍요로워지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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