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d Words Beget Kind Words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스스로 타인에게 말이나 행동을 좋게 해야 자신도 상대로부터 좋은 대접을 받는다는 말을 일컫는 속담입니다. '언니가 너한테 예쁜 말을 하니까 너도 언니한테 고운 말로 대답해야 해' 또는 '저분이 우리에게 저렇게 잘해주셨는데 우리도 한 번쯤은 도와드려도 되지 않겠어?'처럼 일상에서 사람들 간의 대화에 자주 사용되는 말입니다. 글로 쓰인 문장만 보면 지극히 당연한 말이고, 동시에 교훈을 주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양자 간에 비밀스러운 목적이나 특별한 관계를 위한 상황이라면 다르게 생각될 수 있는 부분도 있습니다. 흔히 비유되지 않는 상황이지만, 과거 1980년대, 그러니까 제가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의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제가 어린 시절에는 '촌지'라고 불리는, 지금으로 치면 금품이나 뇌물에 해당하는 것이 학교 선생님들과 학부모 사이에 매우 만연했습니다. 학부모들이 자녀의 학교생활이나 성적에 유리한 영향을 미치기 위해 선생님이나 학교의 영향력 있는 관계자들에게 비밀스레 건네곤 하던 구태한 세태였죠. 지금은 상상하기 힘든 행태였지만, 당시에는 교육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비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너도나도 '내 자식 잘못될까' 하는 마음에 빵 한 봉지라도 선생님들에게 가져다 바치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당시의 한국은 경제가 급격히 성장하던 개발도상국이었고, 학부모들은 교육만이 자라나는 아이들의 유일한 희망이라는 생각으로 물불을 가리지 않고 학교 성적을 위해 비판도 감수하며 촌지를 주곤 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촌지는 그 규모가 점점 커져 급기야 학부모들의 치맛바람으로까지 변질되어, 결국 자라나는 아이들의 교육에 매우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러한 열풍 속에 저희 부모님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여느 부모들처럼 자식의 성적에 울고 웃으시던 제 부모님 역시 선생님들이 가정방문을 오시거나 학교를 방문하실 때 봉투를 준비하시곤 했습니다. 매해 신학기가 시작되면, 지금 생각하면 이해하기 힘든 일이지만, 선생님들은 연례행사처럼 반 아이들의 집을 방문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선생님들의 가정방문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셨고, 봉투를 준비하시는 것도 많이 싫어하셨습니다. 어머니 말씀으로는 당시에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오히려 불이익을 받았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좋은 게 좋은 게 아닌, 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받는 매우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던 것이죠.
저는 자라면서 촌지에 얽힌 상황을 스스로 두번 경험 했습니다. 한 번은 초등학교 때였고,다른 한 번은 중학교 때였습니다. 이후에는 이러한 촌지 행태가 학교 공교육의 공정성과 투명성을 크게 저해한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점차 사라지게 되었지만, 당시 경험들은 촌지의 위력을 여실히 피부로 느낄 수 있었던 경험들이었습니다. 첫 번째는 속담처럼 '좋은 게 좋다'고 할수 있는 순(?)기능을 경험할 수 있었고, 또 다른 한 번의 경험을 통해서는 예상치 못한 매우 큰 불쾌함도 경험할수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시절이었습니다. 전라북도 전주에서 초등학교를 다니고 있을 무렵이었죠. 여느 남자아이들처럼 시끌벅적 장난꾸러기였던 저는 어느 날 수업 시간에 집중하지 않고 당시 짝이던 친구와 신나게 떠들고 있었습니다. 낄낄거리며 장난치는 저희 둘을 담임 선생님께서 지적하셨고, 급기야 둘을 앞으로 불러내어 칠판에 있는 나눗셈을 풀어보라고 하셨습니다. 성적도 신통찮았고 갑작스레 앞으로 불려나가 주눅이 든 탓에, 저는 주신 문제를 풀지 못해 쩔쩔매고 있었고, 그런 제게 선생님은 호되게 혼을 내셨습니다. 뭐라고 하셨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대략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수업 시간에 딴짓한다며 이럴 거면 그냥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셨습니다.
같이 떠들었던 짝은 앞으로 불려나오지도, 혼나지도 않고 저에게만 화를 내시는 선생님이 원망스러웠고 내심 많이 억울했나 봅니다. 선생님께서 집으로 가라는 말씀을 하시자마자 저는 수업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가방을 싸들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른 아침에 갑자기 돌아온 제게 어머니는 자초지종을 캐물으셨고, 저는 이러이러해서 선생님께 혼이 났고 집에 가라고 하셔서 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어머니께서는 그렇다고 정말 집으로 오면 어떡하느냐며 저를 타박하셨고, 곧바로 회사에 계시던 아버지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아버지는 이 황당한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집으로 달려오셨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저를 들으라는 말씀이셨던 것 같습니다. "선생이란 사람이 어떻게 애한테 집으로 가라고 할 수 있느냐"며 불같이 화를 내시던 아버지는 당장 학교로 가서 그 선생을 혼내주겠다며 씩씩대셨습니다. 학교에 다시 가지 않겠다고 버티던 저는 결국 아버지의 차를 타고 다시 학교로 향했습니다. 교무실을 찾아가는 길이 어찌나 멀고 불편하게 느껴지던지요. 교무실에 들어선 아버지는 선생님과 악수를 하셨고, 두 분은 저를 잠시 복도에 세워두셨습니다. 그러나 복도 창문을 통해 아버지의 파이팅을 기대했던 제 예상은 크게 빗나갔습니다.
삿대질하고 혼내주겠다던 아버지의 불같은 분노는 환하고 약간은 비굴한 약자의 웃음으로 바뀌었고, 선생님 또한 수업 시간에는 볼 수 없었던 매우 밝은 미소로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고 계셨습니다. 길지 않은 대화가 끝나갈 무렵, 저는 아버지가 자켓에서 하얀 봉투를 꺼내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선생님 또한 거리낌 없이 봉투를 받으셨고, 두 분의 미소는 더욱 커졌습니다. 큰 소리로 껄껄대시며 복도로 나오신 선생님은 제게 우유 하나를 주시며 머리를 쓰다듬으셨습니다. "그렇다고 정말 집으로 가면 어떡하니, 다 선생님이 네가 잘 되라고 했던 말인데. 앞으로는 더 열심히 잘 해보자?" 그때 들었던 생각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저와 같이 떠들었던 친구네 부모님은 선생님께 봉투를 몇 개나 드렸을까.
중학교 2학년이 되었습니다. 당시는 젊은 선생님들을 중심으로 전교조(전국교직원노동조합) 열풍이 불던 시기였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민주화 운동이 활성화되면서, 선생님들도 촌지와 같은 교육 현장의 부조리를 바로잡고 교사들의 권리를 찾기 위해 단체 행동을 시작하던 때였습니다. 당시에는 교원노조가 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해 정부가 전교조를 불법단체로 간주하던 시기였죠. 우리 반 담임선생님은 혈기 왕성한 20대 후반의 갓 부임하신 국어 선생님이셨습니다. 불안한 시기였음에도 스스로 전교조 소속임을 밝힐 만큼 소신이 강한 분이셨고, 논란이 되었던 촌지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반대하셨습니다.
여느 학년과 같이 담임선생님의 가정방문은 당시에도 진행되어야 했고, 가정방문을 앞둔 어느 날 선생님은 조회 시간에 아이들에게 당부하셨습니다. "얘들아, 부모님께 선물이나 돈봉투 같은 것은 안 받는다고 분명히 말씀드려라." 중학생 남자아이들이 으레 그러하듯 무신경하게 "네~" 하고 대답했고, 저도 집에 와서 어머니께 대수롭지 않게 말씀을 전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여느 남자아이들처럼 저는 선생님의 가정방문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고, 방문하셨을 때도 제 방에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어머니와 거실에서 과일을 드시며 잠시 말씀을 나누시다가 제 머리를 쓰다듬고 가셨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전혀 예상치 못했던 그 사건은 바로 다음 날 일어났습니다.
등교를 하고 아침 조회 시간에 선생님은 갑자기 열 명 남짓한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그 안에 제 이름이 포함되어 있어 깜짝 놀랐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 학생들이 자신이 가정방문을 갔을 때 부모님이 촌지를 주신 학생들이라며, 왜 부모님께 말씀을 전하지 않았냐고 한참을 나무라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아이들에게 책걸상을 들고 복도로 나가라고 하셨습니다. 반성하는 의미로 하루 동안 복도에서 공부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억울하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하고 여러 감정이 한데 뒤엉켰습니다. 돈을 드린 건 어머니인데 왜 제가 복도에서 있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솔직히 그때 심정으로는 어머니가 부끄럽다기보다는 선생님이 더 원망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물론 지금 생각해보면 정의로운 20대 후반의 젊은 선생님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방법이 조금은 서툴렀던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부모님의 부적절한 행동에 대해 아이들이 생각해보고 그로부터 무언가를 배우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아이들을 복도로 내보내셨겠지만, 사춘기 아이들의 마음은 달랐습니다. 돈봉투가 나쁜 것인지는 판단하기 어려웠고, 그저 그 상황이 망신스러웠으며 선생님이 미웠을 뿐이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어머니께 이런 이야기를 드리니, "그렇다고 애들한테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며 타박하시면서도 동시에 저에게 미안해하시는 기색이 느껴졌습니다. 이 일이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아니지만, 우리 집에서도 점차 이런 모습은 사라져갔습니다. 학교의 가정방문 등이 차츰 없어지고, 촌지 문제도 사회적으로도 크게 대두되면서 이를 근절하기 위한 당국의 노력으로 이런 부적절한 관행은 결국 사라지게 되었죠.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속담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타인과의 관계에서 긍정적이고 상호 존중하는 태도를 권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1980년대의 촌지 관행은 이러한 속담의 교훈을 금전으로 왜곡한 시대의 어두운 단면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선생님께 도움이 되고자 부모님이 건넨 작은 봉투에는 사실 자녀 교육에 유리한 영향을 주려는 비밀스러운 목적이 담겨 있었고, 결국 사회적으로 비판받는 그릇된 관행으로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제 초등학교 시절의 경험처럼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어쩌면 긍정적으로 여겨질 수 있었던 촌지도, 한 정의로운 교사가 촌지의 폐단을 지적하며 보여준 미숙하지만 강렬했던 그 나름의 교육을 통해 또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어린 학생으로서 느껴야만 했던 불쾌한 감정도 분명히 존재했지만, 시간이 흐르며 촌지는 사회의 공정성을 저해한다는 인식 속에 결국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잊혀진 창피한 과거가 되었지만, 우리에게 남겨진 교훈은 분명합니다. 어린 동생이 자신을 예뻐해 주는 언니에게 따뜻한 말을 도로 건네듯, 그리고 친절한 이웃에게 고마움의 마음으로 다시 친절로 화답하듯,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진정한 관계는 물질이 아닌 마음에서 우러 나오는 순수함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시작된 관계만이 더욱 진정성 있고 깊이 있는 연결로 발전할 수 있음을 우리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