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내맘같지 않다

Not Going My Way

by 윤본

사회 초년생 시절, 부장님이 툭하면 내뱉곤 하시던 말입니다. 그때는 도대체 왜 자꾸 저런 말씀을 하시는지 꼰대 같이만 느껴져서 신경 써서 듣진 않고 웃으며 흘려보내곤 했었죠. 당시 새로운 솔루션을 개발 중이던 저희 팀은 고객사 미팅이나 회사 내부 미팅에서 우리는 너무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상대방에겐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오히려 제안하는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눈으로 쳐다보는 상황이 많았습니다. 열띤 설명과 설득이 오가는 격렬한 회의를 마치고 나올 때면 부장님은 깊은 한숨을 쉬시며, "윤 대리, 내 맘 같지 않아? 그치?" 하시면서 소주 한잔 하러 가자고 말씀하시곤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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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상황이 자신의 기대나 의도와는 다르게 흘러갈 때 주로 사용하는 관용구입니다. "자식 키우는 게 영 내 맘 같지 않아", "아무리 계획을 세워도 뭐 하나 내 맘처럼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라며 주로 자조적인 표현으로 쓰이죠.


같은 한국 사람끼리도 그러할진데, 말 설고 물 선 외국 땅에서 살다 보면 정말 내 맘 같지 않은 순간들을 더 자주 마주하게 됩니다. 이들의 가치관과 문화를 비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만, 수십 년을 한국에서 살아오며 사람을 응대하는 세일즈 직군에서 밥벌이를 해온 토종 한국인 입장에서는 참 이해되지 않고 안타까운 순간들이 적지 않았죠.


2023년 1월의 일입니다. 저는 시민권이나 영주권 없이 워킹비자로 거주하는 외국인 노동자입니다. 싱가포르는 외국인 노동자가 적법한 비자 없이는 거주할 수 없어서 비자 문제가 매우 민감한데, 특히 저처럼 가족들이 워킹비자에 딸린 가족비자로 함께 머무는 경우엔 더욱 그렇죠. 당시 회사 사정으로 비자를 변경해야 했는데, 회사가 아닌 개인이 보증하는 형태의 워킹비자였습니다. 그래서 모든걸 제가 직접 하나하나 챙겨야 했었죠. 1월 4일이 만료일이어서 4-5개월 전부터 여유 있게 신청했고, 11월이나 12월이면 충분히 발급받을 수 있을 거라 믿었었죠. 또 12월 말에는 가족 여행도 계획되어 있어서 저는 그전에 모든 게 큰 문제 없이 해결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쉽게 처리 될 것 같았단 비자 승인은 계속 늦어졌고, 12월 말이 다가와도 별다른 진척이 없었습니다. 초조한 마음으로 시간만 흘러가는데, 결국 가족 여행을 떠난 유럽에서도 매일 새벽 싱가포르 노동청 콜센터에 전화를 거는 게 일과가 되어버렸습니다. 제게는 너무도 중요한 문제였으니까요. 이렇게 비자가 만료되버리면 여행이 끝난 후 싱가포르 입국할 때도 문제가 될수도 있고, 만에 하나 공항에서 가족들이 뿔뿔히 흩어질수도 있어서, 전화할 때마다 더욱 정중하게, 더욱 간절하게 부탁드렸죠. 정확히 날짜가 기억납니다.


2023년 1월 4일, 파리에 머물고 있던 날이었습니다. 오전 10시 즈음이었죠. 새벽부터 노동청과 전화를 붙들고 실랑이 하느라 지쳐있던 제게 드디어 반가운 문자가 왔습니다. 그렇게 기다리던 비자 승인 문자였죠. 기쁘기도 하고 허탈하기도 했습니다. 내가 신청한게 언젠데, 만료일이 다 되서 이렇게 연락을 주다니 한편으론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얘들아, 참, 내 맘 같지 않다. 휴.” 그래도 큰 걱정거리 하나 해결했다며 이제 편히 여행하자며 가족이 함께 웃었던기억이 납니다.


제 보스는 인도인입니다. 부유한 가문 출신으로 보이는 그는 싱가포르에 10년째 거주하고 있죠. 영업사원으로 시작해서 지금은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몇 개 국가의 영업을 총괄하는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래서인지 매우 적극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인데, 때로는 그의 영업 스타일이 한국적인 정서로 봤을 때 다소 무례해 보일 때가 가끔 있습니다.


그는 한국 대기업의 CEO들을 직접 만나 세일즈를 하라고 요구합니다. 또는 다른 C레벨들과 미팅을 잡아 우리 회사의 제품 도입에 힘을 실어달라 부탁하라고 하죠. 하지만 이르만 대면 다 알수 있는 한국 대기업들의 C레벨들을 만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미팅 주제부터 절차까지 모든 걸 꼼꼼히 준비해야 하고, 사실 그분들의 바쁜 일정에 맞추는 것도 쉽지 않죠. 현실적으로 이런 고위 임원진들과 미팅을 잡는 건 말 그대로 하늘의 별 따기입니다.


한국에서 영업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이런 기본적인 현실을, 외국인의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한국의 보수적인 기업문화나 특유의 위계질서는 겪어보지 않고는 쉽게 와닿지 않으니까요. 한국의 상황을 여러 번 설명하고 다른 접근 방법을 조언해도, 툭하면 튀어나오는 그의 무모해 보이는 제안들을 들을 때면 사실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물론 제 보스는 좋은 사람입니다. 제 말에 귀 기울이려 노력하고, 제 상황을 이해하고 도우려 하죠. 하지만 살아온 배경과 문화가 너무 다르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차이는 분명히 있는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면서도 가끔 속터질 때마다 드는 생각은, 역시 내 맘 같진 않아 입니다 :).


이 관용구를 이번 글쓰기 주제로 선택한 건 사실 어젯밤 있었던 일 때문입니다. 저는 최근 이직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작년 연말 우연히 한 헤드헌터로부터 연락을 받게 되었죠. 솔깃한 직무 요건도 그렇고, 무엇보다 제 경력이 그 회사에 큰 도움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흔쾌히 미팅을 수락했죠. 회사 쪽에서도 제 이력이 마음에 들었는지 곧바로 후속 인터뷰를 진행하자는 연락이 왔습니다.


두 달 남짓한 기간 동안 총 다섯 번의 인터뷰가 진행되었습니다. 인터뷰를 거듭할수록 회사와 제가 바라보는 방향이 점점 일치한다고 느꼈고, 면접관들도 전반적으로 긍정적인 피드백을 주었죠. 마지막 인터뷰에서는 입사 날짜를 이야기하고, 심지어 입사 전이라도 회사 행사에 참석하면 좋겠다는 얘기까지 나눴습니다. 이 정도면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무리없이 오퍼레터는 받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죠.


마지막 인터뷰를 마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그러하다 보니 그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업무에 집중하기도 쉽지 않았죠. 함께 진행했던 헤드헌터도 "거의 마무리된 것 같다"며 축하를 건넸고, 모든 게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당장이라도 오퍼레터를 줄 것 같던 회사 담당자가 갑자기 일주일 후에 최종 결정을 하겠다는 연락을 해왔습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기다릴 수밖에 없었죠.


하던 일도 손에 잘 잡히지 않았습니다. 혹시 다른 경쟁자가 갑자기 생긴 건 아닌지, 인력 충원 계획이 동결된 것은 아닌지, 별의별 생각이 일주일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죠. 그래도 한편으로는 그들이 했던 말과 보여준 태도가 있으니 '잘 될 거야' 하고 스스로를 안심시키곤 했습니다. 드디어 최종 결정을 한다던 어제, 그동안 저와 긴밀히 통화하던 헤드헌터는 제가 보낸 메시지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는 듯했고, 가끔 오는 답변도 "현재 출장 중"이라며 "연락이 오는 대로 업데이트하겠다"는 정도였습니다. 저만큼 궁금하거나 절실해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당사자가 아니니 이해는 갔지만, 내심 괘씸하고 서운했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구보다 절실한 건 나인데, 과연 이 헤드헌터가 내 의지를 잘 전달했을까?' 고심 끝에 결국 담당자에게 직접 메일을 보내기로 결심 했습니다. 다행히 과거에 몇 번 이메일을 주고받은 사이였기에, 직접 연락하는 것이 크게 결례는 아니라고 판단했죠. 최대한 예의를 갖춰 현재 진행 상황을 문의하는 메일을 보내고 답장을 기다렸습니다. 채용 담당자가 유럽에 있어서 밤 12시가 훌쩍 넘도록 잠들지 못하고 메일함만 들여다보았죠.


비록 원하던 회신은 끝내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내 맘 같지 않던 헤드헌터의 무성의한 답변만 기다리고 있었던 것보다는 마음이 한결 나아졌습니다. 담당자도 저의 절실함과 정중함이 담긴 메일을 읽고 어떤 식으로든 반응을 보여줄 거라 생각하니 그나마 위안이 되더군요.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아직 모릅니다. 시간이 흘러 이 글을 다시 읽게 될 때면 지금의 이 순간이 어떻게 기억될지 문득 궁금해지네요. 내 맘 같지 않은 상황들을 이렇게 늘어놓고 보니, 마치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에 젖은 조급한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내 맘 같지 않다'고 느끼는 순간들은, 결국 내가 상대방을 이해하지 못했던 때가 아니었을까요? 나에게 내 맘 같지 않은 사람이지만, 그들에게도 나는 그들 맘 같지 않은 사람이었을 테니까요. 후일 이 글을 다시 읽게 될 때는, 조금 더 너그러운 마음으로 상대를 이해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 있기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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