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으로 보이는 부분이 아니라 그 이면에 감추어진 본질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곧이 곧대로 보이는 상황만 보고 판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항상 의심을 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저같은 조금은 어리버리한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만 받아들이다 나중에 이불킥을 하거나 핀잔을 듣는 일도 종종 생기곤 합니다. 저에게 이 격언의 의미를 남다르게 깨우치게 해주었던 어린 시절 몇 가지 기억들을 꺼내보려 합니다.
아버지는 광주에서 사업을 하셨습니다. 학창 시절 매년 신학기가 시작할 때마다 학교에 적어 제출하는 부모님 직업란에 아버지는 항상 '소방설비업'이라고 적으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광주 대인동에서 'XX소방엔지니어링'이라는 회사를 운영하셨습니다. 주로 아파트나 건물 공사를 할 때 관련된 소방 설비를 주업으로 하셨고 가끔 회사로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소화기등을 판매하시기도 하셨죠.
어릴 적 저는 아버지 사무실에 종종 놀러 갔습니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오후 늦게 아버지 사무실에 들러 직원들과 함께 간식도 먹고, 소파에 누워 노닥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날 저녁에 가족 외식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퇴근 시간이 다 되어갈 즈음, 한 남루한 행색의 손님이 사무실로 찾아왔습니다. 아버지는 입구 쪽에서 그 손님과 꽤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셨고, 손님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는 걸 보니 좋은 상황은 아니라는 걸 저는 느낌적으로 알 수가 있었죠.
허리를 잔뜩 굽힌 아버지는 그 손님을 달래느라 진땀을 빼고 계셨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손님의 핏대는 더 거세지고, 저도 점점 겁이 나기 시작했고, 잔뜩 긴장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어느정도 시간이 흘렀나, 어느덧 손님의 삿대질도 조금 누그러지는 듯했고, 일이 해결이 되었는지 드디어 그 손님은 뒤돌아 가셨습니다. 그래도 아버지는 손님이 건물 밖을 나갈 때까지 고개를 연신 숙이며 쩔쩔매 하셨죠.
짧은 순간이었지만 착잡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계속해서 머리를 조아리는 아버지가 불쌍해 보였고, 밖에서 정말 이런 취급을 받으시는 줄 몰랐던 게 많이 미안했습니다. 그날따라 더 처져 보이던 아버지의 어깨도 마음이 아팠습니다. 효도하는 착한 아들이 되어야겠다고도 속으로 여러번 다짐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들어오시는 아버지의 모습은 제가 걱정했던 표정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주눅 들지 않으신, 너무도 일상적인, 제가 늘 봐오던 아버지의 모습이었죠.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사장님 모드로 돌아오셨죠. 직원들도 평소와 똑같을 뿐 별 동요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아버지는 환히 웃으며 기분 좋은 목소리로 말씀하십니다. "우리 저녁은 뭐 먹을까? 요 앞에 갈비 먹으러 갈래? 아니면 중국집에 탕수육 먹으러 갈래? 아빠가 차 빼놓을 테니까 이따가 앞으로 나와라"
엉뚱한 상황에 잠시 당황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저는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아, 그냥 일이었구나. 어쩌면 아까 그 남루했던 손님보다는 아버지 형편이 훨씬 나아 보이는데, 내가 너무 심각하게 생각했구나. 사업가인 아버지에게는 그저 일상적인 일이었을 뿐, 제가 안쓰럽게 생각했던 모습들조차 영업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아주 일상적인 일이었던 것이죠. 운전하는 아버지의 옆모습을 보며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 저는 그때 어렴풋이 알 수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시간이 좀 흘러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즈음입니다. 어느 날 담임 선생님께서 저를 부르시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말씀을 하십니다.
"아무래도 아버님이 육성회 임원을 맡아 주셔야겠다."
"우리 반에서 가정형편 수준이 '상'인 집이 너희 집 하나야."
얼마 전 선생님은 가정형편 조사를 했었고, 저는 별 생각 없이 '상'이라고 적은 것이 기억났습니다.
"아, 네, 그거요? 알겠습니다. 아버지에게 말씀드릴게요."
그날 집에 돌아와 아버지께 아무렇지도 않게 자초지종을 말씀드렸고, 처음엔 담담하게 듣고 계시던 아버지께, 저는 그날 밤 정말 곡소리 나게 혼났습니다. 전세집 사는 놈이 무슨 놈의 가정형편이 '상'이냐며, 지난 사업에서 생긴 빚 때문에 아빠가 이렇게 고생하는 거 모르냐며, 자식놈 키워봐야 아무 소용 없다며 밤새 잔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하루아침에 저는 속창시도 없는 놈이 되어버렸고, 금전적으로도 아버지께 큰 부담을 드린 놈이 되어버렸습니다. 당시 60만 원이 넘었던 육성회비는, 지금으로 보면 기백만 원쯤 되는 큰 돈이었거든요.
어릴 적부터 아버지가 회사를 다니셨고 또 사업을 하셨던 것도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딱히 불편하게 자라온 게 아니어서 저는 한 번도 우리 집이 가난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부모님은 항상 먹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것들은 빠짐없이 다 해주셨기도 했고, 사실 돈이 없어 뭘 못했던 기억은 전혀 없었으니까요.
우리 집이 전세인지 자가인지 그런 걸 알 나이는 더더욱 아니었고요. 결과적으로 죄송한 짓을 저지르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억울하기도 했습니다. 아니, 그동안 나한테는 그런 힘든 말씀도 한번도 안했으면서, 사달라는 거 다 사줘놓고, 이제 와 나를 속 없는 놈이라고 이렇게나 뭐라 하시다니, 오히려 속상하기도 했습니다.
이제 와 선생님께 저희 집안 사정이 안 좋다고 말을 할 수도 없고, 어쩔수 없이 아버지는 팔자에 없었던 육성회 임원을 맡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놀리기 좋아하던 제 가족들에게 평생 놀림거리가 되었죠.
맞아요. 영업일을 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그런 눈으로 바라볼 필요도 없었고, 거금을 툭툭 내놓을 만큼 우리 집은 대단한 집도 아니었어요. 어린 시절의 이야기이다 보니 제가 순진했다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보는 것이 정말 진짜라 함부로 속단하면 안 된다는 것을 정말 뼈저리게 느꼈던, 강렬하게 창피했던 그런 어린 시절의 소중한 기억들입니다.
This Korean saying reminds us that appearances can be deceiving, and snap judgments often miss the deeper truth beneath the surface. In this essay, the author recalls two humbling childhood episodes that brought this lesson to life. In the first, he witnesses his father, a fire safety business owner, bowing apologetically to an irate customer — only to be surprised moments later by his father's complete composure. In the second, a careless entry of "upper class" on a school family survey triggers a mortifying consequence: his father is unwillingly drafted as a school fundraising offic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