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달도 차면 기운다

When the Moon Waxes, It Must Wane

by 윤본

최근 성황리에 막을 내린 한 넷플릭스 드라마에서 여주인공이 자신만을 바라보며 일평생을 힘들게 살아온 남편에게, 영원히 튼튼할 것 같던 무쇠도 세월이 흐르니 약해진다며 걱정을 담아 하는 나래이션이 드라마 속 얘기 같지 않게 마음 깊이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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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부쩍 지난 세월을 돌아보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시작하던 2000년 말부터 어느덧 25년째 직장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 사이 한국을 떠나 싱가포르로 근무 환경은 바뀌었고 거쳐온 회사도 그 수가 제법 되어 지금 근무하는 회사가 네 번째 회사이네요. 첫 직장에서 12년을 꽉 채우고 퇴사를 하였고, 두 번째 세 번째 직장에서는 5~6년씩 다녔었죠.


처음 직장 생활을 시작할 때는 25년은 고사하고, 아무것도 모르는데 내가 1년은 다닐 수 있을까, 긴장 속에 회사 생활을 시작했던 것 같은데 앞서며 뒤서며 달려오다 보니 벌써 이렇게 되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공식적으로 쉬어본 게 딱 한 달이었습니다. 평생을 힘든 일을 해온 드라마 속 남편처럼 몸 쓰는 험한 일을 한 것은 아닙니다. 화이트 칼라로 적당히 농땡이도 피워가며 일했었고, 월급 루팡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엄청난 실적을 세우며 일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25라는 숫자는, 마치 저를 안아주며 고생했다며 어깨를 토닥여 주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몇 달 전, 우연히 아내가 만기된 보험 상품 얘기를 꺼냈습니다. 부부가 함께 가입한 20년 만기 연금 상품이었죠. 가입할 당시에는 그저 먼 미래의 일처럼 여겨졌던 만기일이 어느새 다가와 있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가입된 다른 보험들도 점검해보니, 이미 오래전에 만기되었지만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상품들, 그리고 앞으로 5년 내에 차례로 만기가 돌아올 상품들이 쉽게 정리가 되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끝이 보인다는 안도감이 들었지만, 동시에 묘한 감정이 밀려왔습니다. 보험 기간만큼 제 인생의 한 챕터도 마무리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 것이죠. 최근 부쩍 느껴왔던 피로감과 무기력함이 갑자기 이해되는 순간이었고, 예전보다 떨어진 업무 능률에 대한 아쉬움도 함께 스쳐 지나갔습니다. 시간의 흐름 앞에서 나이 듦을 감히 부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쩌다 아내와 대화를 나눌 때면, 연신 쉬고 싶다는 소리만 반복하고, 언젠가 한국으로 가면 조용한 바닷가에 작은 집을 구해 낚시도 하고 그동안 쓰고 싶던 책을 쓴다느니, 혼자 계신 어머니 댁에 가서 여생을 돌봐드리고 싶다느니 이런 말들만 많이 나눕니다. 속 깊은 아내는 저를 이해해서인지, 아니면 자주 들어 지겨워서인지 별다른 반응을 하진 않지만 그 세월을 함께 해온 의리가 있어서 일까 제 말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듯이 저는 느껴집니다.


달이 차면 기웁니다. 보름달이 되면 차츰 기울어져 그믐달이 되지요. 세상 모든 것이 번성 뒤에는 쇠퇴가 옵니다. 한때 세계를 주름잡던 기업들도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해 추억 속으로 사라져갔고, 승승장구하던 스포츠 스타들도 전성기를 지나 은퇴를 맞이합니다. 우리 주변에서도 성공에 취해 자만하다 결국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종 듣게 됩니다.


한국에 출장을 갈 때면 고객 미팅을 위해 판교나 강남역, 그리고 또 다른 서울 여러 곳을 누빕니다. 언제부터인지 저도 모르게 지나는 사람들을 유심히 살펴보곤 하죠. 제 또래의 사람들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안타깝게도 요즘 부쩍 제 나이대의 분들을 찾기가 점점 어려워집니다. 물론 만나는 고객도 최고위층이 아니면 모두 저보다 연배가 어린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아쉬움과 함께 감사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병원에 가면 한참 나이 어린 의사 선생님을 만납니다. 내 몸에 무슨 이상이라도 있을까 봐 그 젊은이의 입모양에 모든 신경을 집중하고 경청합니다.

내가 힘차게 달려왔던 그 세상의 주인이 이젠 달라진 것을 겸허히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것이 나의 나이듦에 대한 짜증과 화 그리고 무기력으로 나타나더라도 저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만 할 운명입니다.


이탈리아의 여행길에, 로마에서 차를 빌려 피사를 구경하고 돌아오던 그 밤이 생각이 납니다.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커다란 보름달이 어두컴컴한 산에 걸려있는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한국이나 싱가포르에서 보던 크기의 달이 아닌, 거짓말을 보태면 마치 달 분화구까지 보일 듯한 아주 커다란 달이었습니다. 장시간 운전으로 매우 피곤한 컨디션이었지만 그 달을 바라보자마자 저희 가족은 탄성을 지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믐달은 다시 초승달 상현달을 거쳐 보름달이 됩니다. 내가 잘 나가던 시절의 보름달로 그 누구도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나만의 새로운 보름달로 다시 채워져 힘차게 떠오를 수 있습니다. 직장에서 많은 연봉을 받으며 높은 실적을 쌓고 사람들로부터 박수 갈채를 받던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 오랫동안 꿈꾸어왔던 버킷 리스트들을 하나하나 묵묵히 해내다 보면 어쩌면 이탈리아에서 보았던 그 커다란 달처럼 더 큰 나의 모습으로 인생 후반부를 장식할 수 있습니다.


책을 쓰고 싶었습니다. 작가로서의 책이 아닌 나의 이야기를 남기고 싶었어요. 유명인이 아니기에 태어나서 언젠가는 세상을 떠날 텐데 나를 기억하는 이들을 위해 나만의 이야기가 담긴 책을 쓰고 싶었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죠. 세월이 흐를수록 생각과 계획은 더 선명하게 뚜렷해졌고 약 1년 전부터 묵묵히 준비를 해오고 있습니다. 더 세월이 흘러 그럴듯한 책이 한 권 나온다면 또다시 크게 채워진 제 보름달을 다시 볼 수 있겠죠.


몇 년 전에는 노래를 직접 만들어 보고도 싶었습니다. 작곡을 공부하려고 그럴듯한 컴퓨터도 사고 미디 건반도 준비하고 강의도 열심히 들었습니다. 화성학을 공부하기도 했고 실제로 몇 가지 습작을 해보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생업과 함께 지속하기에는 점점 버거워졌고 급기야 손을 놓고 말았죠. 언젠가 또다시 기회가 된다면 다시 한번 나의 음악을 만들어 보고도 싶습니다. 멋진 가곡을 만들어서 그럴듯하게 불러보고도 싶고, 어린이들과 함께 부를 수 있는 예쁜 동요도 만들고 싶습니다.


달이 차고 기울고 반복이 되듯이 우리 인생의 달들도 서로 다른 모습으로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지나간 달에 슬퍼할 필요는 없습니다.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키워 나갈 또 다른 초승달을 찾아 나서면 됩니다. 이제 겨우 스물다섯 해 일하고, 반백이 되어서 이런 생각들을 하는 게 스스로 기특하고 다행이라고 느껴지기도 하지만 저보다 더 오래 묵묵히 한길을 걸어오신 선배님들 앞에서는 아직 부족한 제 경험과 깨달음이 참으로 겸손해 집니다.




This essay, titled "When the Moon Waxes, It Must Wane," uses the lunar cycle as a metaphor for life's transitions, particularly focusing on aging and career evolution. The author reflects on their 25-year professional journey spanning four companies and two countries, prompted by discovering that long-term insurance policies were reaching maturity.


The realization that these financial investments are concluding parallels the author's growing awareness of their own aging - experiencing increased fatigue, diminished productivity, and yearning for retirement. In conversations with their spouse, the author frequently dreams of a quieter life: writing a book, living by the sea, or caring for an aging parent.


Drawing from observations of business trips to Korea, where they increasingly find themselves surrounded by younger professionals, the author acknowledges how the world around them is changing. Like the moon's inevitable cycle of waxing and waning, they accept that one's prime years must eventually give way to decline.

The emotional center of the essay is a vivid memory from an Italian vacation, where the author witnessed an extraordinarily large full moon. This image becomes symbolic of their philosophy: while one cannot return to their professional "full moon" phase, they can discover new ways to shine through pursuing postponed dreams - writing a memoir or composing music.


The essay concludes with the insight that like lunar phases, our lives continuously transform. Rather than lamenting what has passed, we should embrace change and nurture new beginnings. With humility, the author acknowledges those who have walked their professional paths even longer, finding both gratitude for their journey and peace in accepting life's natural rhyth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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