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면 여기 잠깐 쉬어. 물 한 잔 마시고 다시 뛰자."
요즘 러닝에 푹 빠진 아들 녀석과 며칠 전 함께 러닝을 하러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나름 구색을 갖춘답시고, 트랙이 있는 정식 러닝 코스에서 둘이 함께 달려 보기로 한 것이죠. 아이는 스마트폰에 스포츠 관련 앱도 설치하고, 땀 흘린 뒤 갈아입을 셔츠며, 얼음 물통까지 바리바리 챙겨 러닝 장소로 이동했습니다. 점심을 먹고 오후 두 시쯤 출발했으니 러닝은 세 시부터 시작된 셈이죠.
저는 나름 헬스클럽에서 달리기를 좀 했다고 아이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해 줍니다.
"아빠는 20km에 도전해 볼 거야. 너는 처음이니 10km를 목표로 천천히 한번 달려봐."
"페이스가 중요해. 괜히 빨리 달려 보겠다고 한 번 페이스를 올리면 그걸로 끝이야."
아빠 말을 듣는지 마는지 아이는 이어폰을 귀에 꽂고 준비운동을 하기 시작했고, 그런 아이를 뒤에 두고 제가 먼저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저도 아이도, 옆에서 물을 챙겨주던 아내도 간과한 게 있었습니다. 이곳은 다름 아닌 적도 지역, 게다가 해가 가장 강렬하게 내리쬐는 시간인 오후 세 시라는 사실이었습니다.
호기롭게 뛰기 시작했지만 급격히 체력이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한 10분쯤 지났을까요, 땀은 비 오듯 흐르고 얼굴은 뜨거운 열기로 달아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목표로 삼았던 20km는 제 마음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고, ‘그래, 10km라도 뛰면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헬스장에서는 에어컨도 있고, 선풍기도 돌아가고, 또 넷플릭스도 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운동했었지만, 필드는 너무도 달랐습니다. 그제서야 알 수 있었습니다. 마라톤 대회 출발 시간이 왜 새벽인지를요. 그렇게 온갖 후회 속에 꾸역꾸역 러닝을 이어가던 중, 갑자기 어지러움이 느껴지고 얼굴이 터질 것만 같은 열기에 7km를 앞두고 중단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아내가 있는 곳이 지척이었지만 그곳까지 갈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 주저앉아 한참을 숨을 몰아쉴 수밖에 없었죠.
저도 이렇게 죽을 것 같이 힘든데, 문득 아이가 걱정되기 시작했습니다. 태생적으로 누가 시키면 그냥 하는 성격인 녀석은 이렇게 힘든 상황에도 우직하게 뛸 것만 같아서 더 걱정이 되었지요. 잠시 후 멀리서 녀석이 터덜터덜 뛰어오는 게 보였고, 말 안 하면 계속 갈까 싶어 재빨리 다가가, 아빤 힘들어서 포기했다며 너도 그만 좀 쉬라고 다급히 말렸습니다.
두 사내가 벌개진 얼굴로 얼음물을 들이키는 모습을 아내는 안쓰럽게 바라보았고, 더울 때는 밖에서 러닝하는 건 무리라며, 그냥 헬스장에서 운동하는 게 낫겠다며 애정 섞인 핀잔도 이어졌습니다.
"아들아, 이럴 때는 포기하는 것도 답이야. 계속 이렇게 가다간 더 큰일 날 수도 있거든."
"아빠, 사실 나 힘들면 중간에 쉬면서 뛰었어. 목이 말라 물도 마셨고, 헤헤, 근데 나는 한 바퀴만 더 돌래!"
다시 운동화 끈을 고쳐 매고 달려 나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보다 똘똘하게 대처한 녀석이 한결 듬직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올해는 유독 글로벌 빅테크들의 대규모 구조조정이 기승을 부린 한 해였습니다. 저 역시 그 대상이 되어 급작스레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고, 최근 몇 개월 동안 다른 곳을 알아보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하지만 생각만큼 적당한 포지션은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최근 싱가포르 취업비자 발급이 많이 까다로워져, 현지인이나 영주권자를 제외하고는 이곳에서 새로운 직장을 잡는 것이 매우 어려워진 상황이었죠. 어쩔 수 없이 한국에 돌아가는 것까지 진지하게 고려했지만, 한국 역시 적지 않은 나이 탓에 기회가 쉽게 찾아오지는 않았습니다.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니 만 25년을 일했더군요. 과거 회사를 옮길 때조차 하루도 안 쉬고 바로 출근한 적도 있었고, 길어야 몇 주 정도 쉬고 출근했으니 그 세월 동안 거의 끊임없이 일을 한 셈이었죠.
그래서였을까요? 언제부턴가 일에 대한 의욕도 예전 같지 않은 것 같고, 쉽게 지쳐 가고, 작은 일에도 짜증이 쉽게 나기도 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피로감은 갈수록 더 심해지고, 어떤 날은 수면제를 먹어야 잠을 잘 수 있을 정도로 불면증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속내 이야기를 할 때는 가끔 아내보다는 누나가 더 편합니다. 살갑게 자주 통화하는 사이는 아니지만 오래전부터 몇몇 인생의 중요한 지점에서는 두 살 터울의 누나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마음을 잡아가곤 했었죠.
"누나, 고민이 많네. 갑자기 이렇게 되고 나니 속상하기도 하고."
"어쩌겠냐. 우리 나이가 어느덧 이런 나이가 됐어. 받아들여야지."
"요즘 들어서는 일하는 것도 의욕이 막 안 생기는 것 같아. 솔직히 별로 하고 싶지도 않고. 그래도 막내까지 공부시키려면 몇 년은 더 벌어야 하는데 참…"
"너 번아웃 왔나 보다. 그런데 어쩌면 이게 좋은 기회일 수 있어. 당장 굶어 죽는 거 아니니, 이번 기회에 좀 쉬는 것도 괜찮아."
벌겋게 익은 얼굴로 땀 흘리던 아들 녀석에게 제가 했던 말처럼, 잠시 앉아 쉬는 것도 괜찮다며 누나는 제게 위로를 건넸습니다. 그러나 생각만큼 잘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반강제로 쉼을 선택한 지 어느덧 3개월, 묘한 기운이 마음속에 몽글몽글 생겨나고 있습니다. 사회 초년 시절, 젊은 내가 가졌던 패기, 열정 비슷한 그런 기운처럼 느껴집니다.
‘이번에 새로 직장을 구하면 정말 죽을 힘을 다해서 일을 해야 되겠다.’, ‘한 번뿐인 인생인데, 제대로 한번 해봐야 되겠다.’ 쉽게 지쳐가던 반백의 가슴이 슬그머니 뜨거워지는 것을 느낍니다.
숨을 몰아쉬며 쉼 없이 앞으로만 달려갑니다. 그러다 힘이 들면 잠시 멈춰 서서 물을 마시고, 떨어진 체력을 다시 끌어올리기도 하지요.
인생에 포기란 없습니다. 하지만 가끔은 가던 길을 멈추고, 지금까지 뛰어온 길을 돌아보는 건 어떨까요? 그리고 앞으로의 길은 어느 방향인지, 또 얼마나 남았는지 시원한 물 한 잔 마시며 가늠해 보는 건 어떨까요?
In Korean culture, there is a common expression: “It’s okay to take a short rest.”
Though not a traditional proverb, it reflects a shared mindset: life, like a long run, sometimes requires slowing down rather than pushing relentlessly forward. In this essay, I recall running with my son under the blazing afternoon sun. Struggling to continue, I realized that stopping is not failure but wisdom.
Later, when facing sudden job loss and burnout, the same truth returned to me—resting does not mean giving up. It is a pause that restores strength and reignites passion for the road ahe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