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마음을 두루 살피고자 걷고 마시며 영감을 받은 한국술은,
다른 계절은 그렇지 않지만, 뭔가 8월이 끝나면 여름이 끝난 것만 같아요. 한여름 밤의 꿈처럼 8월이 저물고 있습니다. 매달 <월간 주방장>을 쓸 때쯤이면 한 달이 참 빠르구나 싶으면서도, 그래도 매달 꽤 많은 한국술을 마시고 있구나 싶어서 뿌듯합니다. 예술가에게 영감이 작품의 시작이 되듯이, 주방장에게는 매달 마시는 한국술이 새로운 영감이 되어요. 이렇게 맛있는 술을 몰랐다니. 세상에 이런 술을 어떻게 빚을까! 내심 감탄하면서요.
선선해진 날씨 덕분에 전보다는 자주 걷는 요즘입니다. 한동안 습기로 턱 막히던 숨이 적당히 건조하고 마른 바람으로 바뀌어 선선함을 선사하고 있어서 걷기 참 좋아요. 레베카 솔닛이 "세상을 두루 살피려면 걸어 다녀야 하듯, 마음을 두루 살피려면 걸어 다녀야 한다." 말했듯 내적으로도, 외적으로도 결정을 내려야 할 일들이 많아 피곤한 마음을 살피고자 더 걷고 있습니다. 큰 결심을 한 지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작은 결정을 짓고 바삐 움직이고 있습니다. 세상에 쉬운 일은 없다지만, 움직이는만큼 '내 술'과는 가까워지는 것 같아 방향을 잡고 천천히 나아가고 있어요.
최대한 <월간 주방장>은 해당 달에 마신 한국술을 소개하고 싶은데, 개수를 정해놓고 마시는 게 아니라 항상 다섯 개를 넘어가기 일쑤입니다. 특히 지난 7월에 마신 술이 정말 좋아서 차마 언급하지 않고 지나기엔 아쉬워 노트를 꺼내왔습니다. 지난 7월 강남 '전통주갤러리'에서 시음한 이달의 시음주들을 소개합니다. 처음 마셔본 술도, 익히 들어 봤던 술도, 자주 보는 술까지. 숨 막히던 더위는 그립지 않지만, 지난달에 마신 이 술들은 소개하다 보니 다시 생각나네요! 지나칠 수 없었던 다섯 개의 매력적인 한국술, 8월의 <월간 주방장>에서 함께합니다.
오양주를 기본으로 하는 천비향을 만드는 평택 좋은술의 탁주입니다. 천비향/술예쁘다/택이 처럼 한글의 아름다움을 잘 담아낸 술 이름도 좋지만, 기대를 뛰어넘는 맛과 향 때문에 개인적으로 제가 좋아하는 술들을 만드는 양조장입니다. '택이'라는 새로운 탁주가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마셔보기도 전에 정감 가는 이름 때문인지 빨리 마셔보고 싶었어요. 만나진 못했지만, 옆 동네 사는 친구의 동생 같은 익숙한 느낌의 맛일까요?
# 정보
식품유형 탁주
알코올 8%
내용량 500ml
성분 평택산찹쌀25.60%, 평택산멥쌀17.08%, 정제수 54.88%, 우리밀누룩 2.44%
양조장 좋은술
# 코멘트
“화이트와인 같은 막걸리"
이 술은 '택이'같은 맛이야 라고 설명한다면 도대체 무슨 맛이냐고 궁금하시겠죠? 그런데, 정말 택이가 생각나는 맛과 향을 지녔습니다. 과하게 달지 않고, 그렇다고 밋밋하지도 않고 부드럽게 넘어가는 베이직한 탁주입니다. 전통주갤러리에서 실온 온도로 한 번, 그리고 이번 2019 대전국제와인페어에서 차갑게 칠링한 저온으로 한 번 마셨는데 온도에 따라 매력이 확 달라지는 술입니다. 미지근하게 마셨을 땐 뭉근한 쌀의 향과 약간 밀막걸리나 어렸을 때 옆에서 얻어 마셔본 '노동주'가 생각났는데, 차갑게 마시니 상쾌하고 깔끔한 '식전주'가 떠올랐습니다. 가끔 다른 술들도 실온에서 두고 마셔봐야겠어요. 매력이 이렇게나 다르니!
# 어울리는 음식
“토마토 절임을 곁들인 부리타치즈 샐러드"
차갑게 칠링한 택이와 깔끔하면서도 그 질감이 매력적인 부리타치즈 샐러드는 환상의 조합이 아닐까 싶습니다. 샐러드 한 입에 택이 한 입 하다 보면 애피타이저가 메인처럼 느껴지는 마법.
병영소주는 쌀이 귀한 시절에 빚어 마셨던 술로 지금은 옛 방식 그대로 김견식 명인의 손끝에서 재탄생해 빚어지고 있습니다. 현재 양조장이 위치한 전라남도 강진은 조선시대 지역 병권을 총괄했던 곳으로 남다른 역사를 품고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이름이 병영소주인 이유도 바로 병영생활 때 마셨던데서 비롯했다고 해요. 일반적으로 한국술을 빚을 때 쓰는 쌀이 아닌 '보리'로 만든 소주는 이름처럼 보리 특유의 구수함을 어떻게 간직하고 있을까요? 보리라면 맥주와 비슷한 맛이 소주에서 날까요?
# 정보
식품유형 증류식 소주
알코올 40%
내용량 700ml
성분 정제수, 보리증류식 소주원액
양조장 병영주조장
# 코멘트
"부드럽게 올라오는 보리의 단 향"
보리의 구수한 향과 증류 과정에서 생겨난 고소한 향이 달콤한 향과 함께 은은하게 잘 어우러져 있습니다.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제게는 40도라는 고도주임에도 불구하고 목넘김이 상당히 부드럽다고 느꼈어요. 처음 마시는 분들은 40도의 짜릿한 도수에 놀랐다가도 목을 타고 오는 향을 좋아하시더라고요. 맛 또한 보리술 특유의 구수함과 청량함을 잘 간직하고 있어서 구수함과 깔끔함을 동시에 갖춘 소주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 어울리는 음식
“어향가지"
어향가지에 사용되는 가지는 튀겼을 때 자체적인 식감을 위해 따로 튀김옷을 입히지 않아요. 달고 고소하면서도 가지가 가진 특유의 향에 적산초와 청산초가 곁들여진 어향가지는 저절로 술을 부르죠. 산초는 많이 강하고 자극적일 수 있으니 기호에 따라 조절하는 것이 맛을 제대로 이끌어내는 주방장의 포인트입니다. 고도수의 한국술과 중국요리는 언제나 성공하는 마리아주 조합입니다.
우리나라 탁주 중 가장 멋있다고 생각하는 술 이름입니다. 만강에 비친 달이라! 술 상품명이 그 술의 모든 걸 설명할 순 없지만, 이 술은 멋진 이름만으로도 술의 맛이 그려지곤 해요. 어스름한 여름 강가에서 찰랑이는 강 표면 위로 처연하게 비친 달의 모습을 그려보니... 술 한 잔이 간절히 생각나네요! 지난 6월에 방문한 강원도 홍천 예술 양조장에서 마신 만강의 비친 달을 전통주갤러리에서도 또 만나 반가웠습니다. 새콤한 첫맛에 놀라서 한 병 데려오기도 한 이 술. 또 마셔봤을 땐 더 놀라웠습니다.
# 정보
식품유형 탁주
알코올 10%
내용량 500ml
성분 홍천쌀, 정제수, 단호박, 곡자
양조장 예술
# 코멘트
“산미는 긴 여운을 남기고"
홍천의 쌀과 물, 그리고 자가누룩에 미니 단호박을 이용해 빚은 탁주입니다. 색은 제법 탁한 편이며 노란 빛깔을 띄고 있습니다. 탁도에서 짐작할 수 있듯 입 안을 꽉 채우는 바디감을 자랑합니다. 향과 맛에서는 잘 익은 열대 과일과도 같은 신선한 산미가 느껴지는데 뒤에 이어서 나는 단 맛과 조화를 이루네요. 이름처럼 가까이 있는 듯했던 노오란 달(=단호박)이 알고 보면 저 멀리 있듯이 긴 여운을 남겨주는 술입니다.
# 어울리는 음식
"느타리버섯 탕수"
산미가 있어 묵직한 육류를 떠올렸다가 탁주 자체만으로도 무겁기 때문에 버섯탕수와 함께 즐겨봤어요. 다른 버섯들도 좋지만 쫄깃한 식감이 매력적인 '느타리버섯'을 사용했습니다. 튀김옷은 얇게 한 번만에 끝내기보다 바삭한 식감을 위해 적당한 두께로, 두 번 튀겨주세요. 더불어 소스는 노란 과일들을 이용해 보다 상큼함을 가미한다면 완벽한 안주 요리가 완성됩니다.
오메기는 차조의 제주 방언입니다. 예로부터 제주에서는 땅이 물을 보존하지 못해 벼농사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반적인 쌀을 이용해 술을 빚지 않고 이 '오메기'를 이용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오메기떡(차조떡)을 만들고 그 떡으로 술을 빚습니다. 이렇게 발효하면 오메기술, 그리고 증류하면 고소리술이 되죠. 이렇게 한 가지 재료로 전혀 다른 매력을 지닌 술들이 탄생합니다.
# 정보
식품유형 약주
알코올 16%
내용량 500ml
성분 좁쌀, 햅쌀, 정제수, 누룩
양조장 제주술익는집
# 코멘트
“풍부하고 다채로운 향을 지닌 술"
4대째 내려오고 있는 명인의 '오메기술'로, 매력적인 산미가 돋보이는 약주입니다. 먼저 곡물 특유의 단 향과 과실향이 기분 좋게 코끝을 스칩니다. 이 향은 단 한두 가지로 정의 내릴 수 없는 풍부한 향이에요. 달콤한 맛에 진하면서도 산도가 좋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질리지 않으면서 맛은 보다 부드럽게만 느껴지네요. 한마디로 입에 착착 감기는 술이에요. 제주샘주의 오메기술과는 또 다른 매력을 지녔습니다. 다음번엔 두 가지 술을 함께 마셔보고 정확히 비교해보도록 하겠습니다.
# 어울리는 음식
“우엉밥"
풍부한 향에 보다 섬세하게 즐기고 싶다면 꼭 우엉밥일 필요는 없어요. 뿌리채소를 이용한 솥밥이면 뭐든 좋아요. 버섯, 야채들과 함께 볶아서 뜸 들일 때 넣어도 좋고, 처음 밥 지을 때부터 넣으셔도 괜찮아요. 우엉에서 나온 슴슴하고 단 향으로 더 다채로운 한 끼 식사가 될 거예요.
국산 와인 시장이 커지고 있음을 지난 대전와인페어에서 실감했습니다. 샤또미소는 그중에서도 한국와인 선발주자라고 할 수 있을 텐데요. 종종 와인이 전통주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의견도 있지만, 한국에서 나고 자라는 재료로 빚은 술이라면 범주에 포함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한국에서 맛있게 자란 과일로 빚은 술들이 더 다양해져서 (별로 좋아하는 말은 아니지만) K-wine 시장의 지평을 넓히는 게 전체적인 한국술 시장의 발전에 있어 도움이 될 거라 믿어요. 그런 의미에서 샤또미소는 한국 와인의 어떤 면모를 확장시킨 술일까요?
# 정보
식품유형 과실주
알코올 12%
내용량 750ml
성분 포도, 메타중아황산칼륨
양조장 도란원
# 코멘트
“잔잔한 미소를 짓게 만드는 맛"
샤토미소는 캠벨을 주원료로 한 과실주 치고는 붉고 맑은 것이 특징입니다. 첫 향으로는 잘 익은 베리류의 향에 여름의 싱그러운 딸기향이 잔잔하게 피어올랐어요. 한 모금 딱 머금고 삼켜보니, 단맛이 적당해 부드럽고 편하게 다가옵니다. 그리고 약간의 탄닌감과 함께 산미도 느껴졌지만 강한 편은 아니었습니다. 로제 스위트라는 이름처럼 레드와인보다는 부드러웠으며, 산미에 바디감이 없어 화이트와인처럼 가볍게 느껴졌습니다.
# 어울리는 음식
“고사리와 두부면을 이용한 파스타"
크게 달지 않기 때문에 적당히 다른 향과도 잘 어울릴 것 같았어요. 적당히 간을 해서 볶아낸 고사리는 보다 씹을 때마다 특유의 향을 잘 살려내 줍니다. 거기에 고소하고도 담백한 두부면의 조화라면 머금고 있는 미소가 떠나가지 않을 거예요.
2019년 8월호 <월간 주방장>에서는 지난 7월에 미처 소개드리지 못한 아쉬운 한국술을 소개했습니다. 다양한 한국의 술들이 주방장에겐 소중한 영감이 됩니다. 덕분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는 <월간 주방장>이 영감을 저장하는 노트가 되고 있어요. 한국술에 대한 기록이면서 독자분들께 다양한 술을 소개하겠다는 저의 약속이고 실천입니다. 더 이상 새롭게 소개해드릴 술이 없는 그날까지 (과연 얼마나 걸릴까요?) 매달 기록은 꾸준히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선선해진 8월에도 잊지 않고 꼽아 본 '장원 술과 아쉬운 차석 술' 선정입니다.
장원(베스트 우리술)은 제주맑은오메기, 차석(2% 아쉬운 우리술)은 샤또미소입니다. 오메기의 깊고 풍부한 맛을 약주로 느낄 수 있어 감사했고, 진한 포도맛을 느낄 수 있을 거라 기대했던 샤또미소는 조금 아쉬웠습니다. 더위가 한 풀 꺾인 게 서늘하고 바삭거리는 바람에서 느껴지는 8월의 끝자락입니다. 완연한 가을이 될 9월에 새로운 한국술로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