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대전국제와인페스티벌에서 만난 '한국산 와인' 과 한국와인 시장
"한국 와인도 전통주인가요?"
전통주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항상 의문인 점이 있다. 과연 한국 와인도 전통주라 할 수 있느냐는 것. 처음엔 회의적이었던 주방장도 한국 와인을 마시고 즐겨보니, 맛있는 술에 굳이 구분을 지어야 할까라는 우문현답을 얻었다.
최근 전통주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라면 한국와인에 대한 관심이 높다는 걸 체감할 수 있다. 프랑스나 칠레, 캘리포니아 등 와인 산지로 유명한 지역이 아닌 우리 땅 '한국'에서 나고 자란 과일로 와인을 만든다니! 절대 안 될 것 같았던 국산 와인 시장이 서서히 커지고 있는 것이다. 아래 최근 기사만 보더라도 한국 와이너리가 특급 호텔과 함께 프로모션을 진행하고, 유명 레스토랑에서도 한국 와인을 찾아볼 수 있다. 국제 와인들 사이에서 한국산 와인이 두각을 나타내며 기라성 같던 유명 와인들과도 견줄 수 있을 듯하다.
[국제와인품평회 베를린와인트로피, 영천 `오계리·고도리 와이너리` 입상] 경북신문 2019.8.7 기사
[JW메리어트 서울 '피치 프로모션' 진행해] 한국경제 2019.8.13 기사
[“한국와인 좋아요”…특급호텔 관심 폭발] 서울신문 2019.8.14 기사
올해로 8회째를 맞는 '대전 국제 와인 페스티벌'에서도 국산 와인 시장이 커졌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화이트와인 시음존과 레드와인 시음존 사이에 '전통주' 섹션이 따로 열렸다. 그리고 그 가운데 전통주와 한국산 와인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한국민속주협회에서는 전통주 BAR를 준비해서 20종이 넘는 약주, 증류주를 자유롭게 시음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고, 장희도가/조은술/내국양조 등 기존에 유명한 한국술 양조장도 부스를 잡고 참여했다.
기대보다 한국 와인 업체들이 다양하게 참여했다. 익숙한 한국 와인도 있었고 네추럴 와인과 복숭아, 감, 매실 등 다양한 한국 작물들로 만든 와인 업체들이 돋보였다. 주방장은 한국 와인 섹션만 두 시간 돌아다니며 하나하나 시음해보는데 예상을 뛰어넘는 맛과 향에 놀라기도 하고, 상상했던 딱 그 맛이라 기대를 넘지 못하는 와인도 있었다. 간단히 남긴 주방장의 한국 와인 시음 노트를 브런치에 공개한다.
‘제주 감귤 허니와인’은 벌꿀로 만든 순수 미드에 제주감귤 과즙을 첨가해 만든 미드(벌꿀주)이다. 첫 향에서는 적당한 산미와 단 향 그리고 복합적인 과실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일반적인 미드가 아닌, 과일을 첨가해 만든 멜로멜은 처음이었다. 입에 털어 넣고 나니 향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자몽 특유의 쓴 맛이 느껴졌다. 보통 영한 빈티지에서는 보다 신선한 과일 그리고 깔끔한 맛이 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오랜 빈티지여서 그랬을까. 하지만 덕분에 복합적인 향과 깊은 맛을 느낄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예인화원의 시음주는 총 4가지로, 뒤에서부터 차례대로 남산애 포트와인, 남산애2014, 가을빛2016 그리고 남산애2017 이었다. 양조장 이름과 라벨에서부터 왠지 모르게 담백하고 포근한 이미지가 느껴졌는데 맛과 향 모두 이미지와 부합하였다. 모두 좋았지만 그중 특히 가을빛2016은 와인 특유의 떫은맛이 없이 화이트와인처럼 무척 깔끔하고 맑았다. 그리고 자신 있게 ‘국내 유일’의 포트와인을 맛 보여주셨다. 생각보다 단맛은 약했지만 충분한 산미와 복잡한 풍미에, 여느 한국 와인에서 맛보지 못한 특유의 상큼함으로 마지막까지 기분을 좋게 했다.
미드로 유명한 아이비영농조합의 허니비와 허니문 향은 꿀 그리고 싱그러운 풀 향으로, 강하지는 않지만 은은한 편이다. 맛 역시 꿀 향이 산뜻하게 다가온다. 알코올 도수가 낮아 목 넘김이 부드러우며, 식전과 식후 상관없이 가볍게 즐기기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 세계적으로 '미드'는 신혼여행을 떠나는 신혼부부들에게 선물하기 좋기로 유명한데, 허니비와 허니문도 그러한 의미에서 한국산 미드로 인기가 많다고 한다.
수도산 와이너리에서의 시음은 총 5종으로, 그중 크라테 2015년산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높은 균형미와 부드러운 당도를 지녔으며 적절한 검은 과실의 향기가 조화를 잘 이룬 와인이었다. 한국의 토종 품종인 산머루를 이용한 와인의 편견을 깰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특히 유독 2016년에 포도 수확이 어려움을 겪었다고 대표님이 말씀하셨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셨다고 하신다. 크라테는 오로지 '단'맛만 나는 다른 와인들에 비해 적당한 탄닌감 덕분에 한국와인도 풍부해질 수 있음에 감사했다.
홍시로 만든 와인이라길래 신기한 마음으로 다가갔다. 감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초산균 때문에 식초로 쉽게 변해 홍시는 와인으로 만들기 어려울 재료이다. 그런데 직접 홍시를 만드셔서 와인을 출시하셨다고 하시니 궁금해 마셔보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예상대로 감식초와 같은 향과 맛이었다. 살짝 떫은 듯하면서도 와인의 산미와는 다른 시큼한 맛이다. 한 모금 더 마셔보라는 권유에 따라 음미해보니 목을 타고 천천히 올라오는 감 특유의 단 향이 느껴졌다. 이번 대전 와인페스티벌 한국 와인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술이었다.
잔에 따르면서 피어오르는 '직선적인' 단 복숭아 향이 코끝을 자극한다. 어떠한 것도 첨가하지 않은 순수 과실주라고 하지만, 복숭아 음료나 통조림에서 나는 듯한 짙은 향이 났다. 전반적으로 복합적인 풍미는 아니었지만 향에 비해 혀끝에서 감기는 맛은 산뜻한 편이다. 끝 맛이 깔끔해 디저트 와인으로 복숭아를 좋아하는 많은 여성들로부터 충분히 사랑받을 만한 와인이다. 다른 것보다 고도리 와인들은 라벨을 유럽산 와인 못지않게 고급스럽게 잘 뽑아낸 듯하다.
홍시와는 또 다른 감의 풋풋한 향이 느껴졌다. 맛을 보니 그래도 감은 감인가 보다. 감식초처럼 톡 쏘는 맛은 무시 못하지만 강한 편은 아녔으며, 오히려 신선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전반적으로 깔끔하며 감 특유의 감칠맛은 코스 요리 사이사이에 곁들여 마시기에도 잘 어울릴 와인이다. 감이라는 과일 하나가 두 가지 다른 와인을 만들어 내기에 더 재밌는 한국와인! 홍시와인과 함께 비교해서 마신다면 재밌을 와인이다.
잘 익은 사과의 상큼한 향이 기분을 좋게 한다. 입 안에서는 적당한 알코올과 신선한 산미와 함께 혀끝에 맴도는 단맛, 감칠맛이 느껴진다. 목 넘김도 부드러우며 끝 맛도 깔끔해 포도와는 또 다른 매력을 자랑하는 추사 사과와인이다. 몇 년 만에 처음 알게 된 사실은 시음용에는 금박이 없다는 것이었다. 특히 추사 로제 스위트는 속까지 빨간 사과인 '레드 러브' 품종을 이용해 만들었다고 하는데, 화이트 버전보다 약간의 신맛이 더 느껴져서 새로웠다. 더불어 독특한 디자인의 소서노의 꿈(=추사 40)은 사과 브랜디로 언제 마셔도 묵직한 매력을 자랑하는 술이다. 와인도 좋지만, 한국산 브랜디도 더 다양해진다면 유럽에 견줄만하지 않을까?
와인이라고 한다면 단 맛과 신 맛, 바디감, 탄닌, 피니쉬의 조화가 중요하다. 그리고 그중 화이트와인이라고 한다면 신 맛이 가장 중요한데, 이 산미를 가장 고급스럽게 잘 살린 와인이 바로 '그랑고또 청수와인'이 아닐까 생각한다. 첫 향부터 풍부한 과실향을 뽐내며 코끝을 자극해주고 이내 산뜻한 산미가 느껴진다. 처음에는 높은 산도에 어색해할지 모르지만 천천히 즐기다 보면 생동감 있고 신선함이 긴 여운을 남겨준다.
올해 3월에 다녀온 광양매화축제에서 맡은 향긋한 매화꽃향이 익숙하게 다가왔다. 적당한 볼륨감과 부드러운 텍스쳐가 입 안에서 느껴졌다. 평소 알고 있던 발효한 매실보다는 많이 달지도, 시지도 않았으며 자두향과 흙향이 인상적이었다.
비교적 오래되지 않은 한국와인은 그동안 다른 주류와 마찬가지로 대기업 위주로 생산되고 판매되어 그저 공산품에 지나지 않았다. 자연스레 원료나 각각 와이너리의 이야기보다 수입 업체만을 믿고 사 먹었다. 하지만 한국 와인 시장은 꿈틀대고 있었다. 아직 한국 와인이 영세하지만 꾸준한 실험과 노력하는 형태를 잘 갖춰 나가고 있음을 이런 와인 행사를 통해 발견할 수 있었다. 수백 년 동안 명성을 이어온 유명 와인 시장과 단숨에 비슷해질 순 없어도 차근차근 퀄리티를 높이고 다양한 시도를 한다면 어느 순간 비슷한 선상에 오를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농림축산식품부에서 주관하는 '찾아가는 양조장'*은 꿈틀거리는 한국 와인 시장을 확장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찾아가는 양조장 투어뿐만 아니라 와이너리 자체 투어, 시도군이 직접 나서서 영농업체를 살리는 관광 상품을 만들어 지역 양조 시장을 부흥시키고 관심을 갖게 한다면, 수요만큼 생산과 공급도 자연스레 늘어날 것이다. (*찾아가는 양조장은 유럽의 와이너리 못지않게 다양한 체험부터 식사, 숙박까지 고루 갖춘 양조장들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현재는 양조장 자체가 체험 시스템을 다 갖춰야만 신청 가능해 진입 장벽이 높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지자체에서 지역 관광 상품으로 양조장이나 와이너리를 홍보하고 힘을 실어주면 한국술 전반적으로 긍정적인 변화가 생기기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