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술이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공간을 꿈꾸다
더위를 많이 타는 저에게는 아직 여름 같지만, 10월의 막바지가 되니 이용의 <잊혀진 계절>이 저절로 떠오르는 가을입니다. 티비나 라디오, 길거리에서 이 노래가 나오면 '아, 한 해가 마무리되고 있구나' 느껴집니다. 가을은 가___을 이라는 열었다가 아름답게 닫히는 발음도, 계절 자체가 주는 분위기와 쌀쌀함도 좋은 시절이죠. 계절은 가을에서 겨울로 향하며 마무리되고 있지만, 주방장에게는 오히려 시작하며 열리길 앞두고 있습니다. 이번 달엔 문토 멤버들과 함께 술이 마치 아름다운 무대에 선 것 같은 공간을 찾아 즐기고 왔습니다. 그곳에서 멋지게 경험한 술들을 이번 월간 주방장에서 소개해 드립니다.
덧술을 두 번 하는 삼양주 기법으로 빚고 증류한 메밀로25는 25도와 45도 두 가지로 선택해서 마시는 즐거움이 있는 술입니다. 45도 메밀로는 호리한 병목의 병이 아니라 뭉툭한 병에 담겨있어 구분하기 쉬운데요. 메밀로를 만드는 두루 양조장은 강원도 홍천에 위치한 양조장으로 직접 재배한 메밀로 술을 빚고 누룩까지 직접 만듭니다. 메밀소주 외에도 무첨가물 탁주인 <술헤는밤>이나 <삼선> 등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한국술을 만드는 양조장이기도 합니다.
# 정보
양조장 두루 양조장
식품유형 증류주
알코올 25%
내용량 500mℓ
성분 정제수, 쌀, 국, 메밀
# 코멘트
“매끈한 메밀의 부드러움"
고소하면서 목 넘김이 실크처럼 부드럽게 느껴집니다. 구수하게 느껴지는 증류주 특유의 향과 메밀향이 아름다운 조합을 만들어 내고요. 메밀:쌀 1:9의 비율로 증류한 술이라 100% 쌀 증류주보다 단맛이 덜할 거라 생각했지만, 적당한 단맛도 고소한 풍미도 느껴져서 균형이 잘 맞는 술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증류주 치고 부담스럽지 않은 도수에 500ml라는 넉넉한 양까지. 홍천의 좋은 물을 이용해 빚어서 그런지 두루 양조장의 술들을 좋아합니다. 메밀로를 통해 좋은 물이 좋은 술을 만들어내는데 중요한 핵심 요소임을 다시금 느끼게 되었어요.
# 어울리는 음식
“메밀 새싹을 곁들인 비프 타르타르"
고소한 식감을 자랑하는 비프 타르타르를 알싸하고 씁쓰르한 메밀 새싹을 올려 먹는다면, 식감도 좋지만 메밀의 부드러운 면과 구수한 맛까지 느낄 수 있습니다.
여느 탁주보다 높은 산도를 자랑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 맛은 당도와 함께 진해지는 <꽃잠>입니다. 처음 탁주의 세계로 빠지기에는 어색할 수 있는 술일지 모릅니다. 쉽게 만날 수 있지도 않을뿐더러 단양주를 마셔볼 기회가 많지 않기 때문이죠. 물 맑고 공기 좋은 지리산 둘레길 자락에서 빚어지는 이 술, 이름부터 자연 본연의 맛이 기대되는 꽃잠은 어떤 새로운 자극을 주었을까요?
# 정보
양조장 지리산 옛술도가
식품유형 탁주
알코올 6%
내용량 1,000mℓ
성분 정제수, 국산 쌀, 우리밀 누룩
# 코멘트
“색다른 맛을 즐기고 싶다면"
<꽃잠>이라고 하면 산도가 높은 탁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이 날 마신 탁주는 예외였습니다. 술에 나이를 매길 순 없겠지만, '젊은 맛'이라는 표현 외에는 떠오르질 않네요. 라벨을 보니 세상으로 나온 지 며칠 되지 않아서인지 풀내음과 상큼한 청포도의 향, 그리고 적절한 산도까지 갖춘 화이트 와인의 맛이었어요. 조금만 더 묵혔다가 마시게 되면 또 다른 맛이 전해져서 색다른 맛을 안겨주는 매력을 가진 술입니다.
# 어울리는 음식
“블루치즈를 사용한 파스타"
쌉쌀하면서도 톡 쏘는 강한 냄새가 특징인 블루치즈는 가열조리를 하는 순간, 보다 부드러운 풍미를 자랑하죠. (그럼에도 아직은 어색한 향들이 남아있을지 몰라요.) 이때 특유의 산도를 자랑하는 <꽃잠>과 함께 한다면 입을 깔끔하게 정리해주면서 다채로운 향을 즐기는 한 끼 식사가 될 수 있어요.
최근 조명받는 양조장들을 보면 물 좋다고 소문난 강원도 쪽에 많이 위치해 있음을 알 수 있어요. 그래서 홍천강의 깨끗한 이미지를 그대로 살리고 싶어 붙여진 이름도 예술 양조장의 삼양주, <홍천강 탁주>입니다. 과연 홍천강의 물은 어떤 맛을 낼까요? 큰 물이라는 뜻을 가진 홍천강의 홍(洪)처럼 우리의 다양한 감각을 채워줄지 궁금증을 유발하는 탁주입니다.
# 정보
양조장 예술 양조장
식품유형 탁주
알코올 11%
내용량 500mℓ
성분 홍천쌀, 정제수, 곡자
# 코멘트
“홍천강의 청정한 이미지를 담은 술 "
찹쌀과 멥쌀을 주원료로 한 탁주로, 전체적으로 드라이한 편입니다. 옹기에서 140일 이상 저온 발효를 해서인지 탄산감은 없으나 은은한 꽃 향을 잘 품고 있습니다. 처음 맡은 향과는 다르게 입 안에서는 적당한 산미가 있어 보다 깔끔하게 느껴집니다. 넓고 큰 물이라는 이름을 가진 홍천강처럼 한 자리에서 오래 마셔도 질리지 않을 탁주입니다.
# 어울리는 음식
“한치 순대 그리고 먹물&간장 소스"
순대로 쪄낸 한치의 은은한 단 향에 적당히 짭조름한 먹물 소스가 곁들여져 입 안은 보다 다채로워집니다. 연속해서 소스를 찍어먹는다면 조금 짤 수 있다고 느껴질 때, 홍천강 탁주가 시원한 강물처럼 깔끔하게 씻고 지나갑니다.
한강주조 <나루 생 막걸리>의 인기가 나날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아직 출시된 지 일 년이 채 되지 않았는데도 전국 유명한 주점 어디를 가든 볼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탁주입니다. 1리터라는 대용량임에도 부드럽기 때문에 벌컥벌컥 들이켜기 좋습니다. 6도에 이어 최근에는 11.5도 신제품도 출시했다고 하는데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한강주조의 시그니처, <나루 생 막걸리>입니다.
# 정보
양조장 한강주조
식품유형 탁주
알코올 6%
내용량 935mℓ
성분 정제수, 쌀(국내산), 국, 효모
# 코멘트
“부드러운 텍스쳐를 가진 탁주"
보통 막걸리는 배부르기도 하고 쉽게 물리곤 하는데, 나루는 질리지 않는 가벼운 목 넘김이 매력적인 탁주입니다. 다른 긴 말이 필요 없이 정말 맛있게 잘 만들었다고 생각이 듭니다. 단순하게 '맛있다'는 표현을 좋아하진 않지만 가벼운 단 맛과 바닐라 향, 과일향 그리고 부드러운 텍스쳐까지 맛있다는 말이 절로 나오네요. 한강주조 측의 제안에 따라 큰 잔에 마시게 되면 오롯이 달큰한 바나나 향이 코 끝에 머무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 어울리는 음식
“레몬에 절인 비트를 올린 누룽지 타코"
구수한 누룽지를 이용해 만든 타코 위에 레몬에 절인 비트를 소금 후추 간만 살짝 해서 버무린 한 입 크기의 음식입니다. 나루 생 막걸리가 특유의 부드럽고 달콤한 맛이기 때문에, 이에 상응되는 새콤하면서 구수하고, 짭조름한 음식을 곁들여 보았습니다. 1리터라는 양이 많을 수 있어 음식의 양은 작은 타파스의 형태로 준비했습니다.
‘부자 시리즈’ 탁주는 업계 최초로 브랜드 쌀인 ‘경기미’로 빚은 프리미엄 막걸리입니다. 특히 10의 경우 배혜정도가 대표의 아버지인 古배상면 씨가 개발한 발효주인데요. 서울 상류층에서 마시던 고급 탁주를 쌀과 누룩만을 이용해 현대인의 입맛에 맞도록 복원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여느 양조장들 보다 다양한 제품 개발에 앞서 노력하는 정말 마음씨 넓은 부자 같은 양조장의 술, 부자10 막걸리입니다.
# 정보
양조장 배혜정도가
식품유형 살균 탁주
알코올 약 10%
내용량 375mℓ
성분 물, 쌀, 고과당, 국, 구연산, 젖산
# 코멘트
“둥글둥글한 성격 좋은 친구 같은 술 "
부자 막걸리는 부자라는 이름처럼, 넉넉한 매력이 특징인 술입니다. 넉넉하다고 해서 모든 부분이 꽉 차지 않고, 정도를 지키며 둥글둥글한 몽돌처럼 술맛이 균형을 이룹니다. 살균탁주의 잔잔해서 안정되었지만, 약간은 죽어있는 맛이 아닌 적당한 생기의 단맛과 감칠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배혜정도가 부자 시리즈로는 부자 쌀 막걸리, 자색고구마, 송산포도가 있는데 이제 송산 포도만 마셔보면 부자 정복을 할 수 있겠어요! 같은 이름이지만 다른 부재료가 들어가 재미를 더하는 술은 막걸리의 매력 아닐까요?
# 어울리는 음식
“취나물 아란치기"
부자 막걸리는 단 맛이 적당히 느껴지기 때문에, 씁쓸한 맛이 매력적인 취나물과 어울리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탈리아의 대표 요리 중 하나인 아란치니를 한국식으로 재해석한 취나물 아란치니는 좋은 궁합을 이룰 수 있죠.
이젠 '어디 가서 뭐 마시지?'가 아니라 '이 술은 꼭 여기 가서 마셔야지'라고 생각하게 되어요. 우리 술이 주인공이 돼서 즐겨질 수 있는 공간, 초면인 술도 구면인 술도 그 맛과 매력으로 음식과 함께 곁들일 수 있는 공간. 그런 '맛'과 '멋'진 공간을 꿈꾸고 있습니다.
장원주(참 좋았던 한국술)는 메밀로25, 차석주(뭔가 2% 아쉬웠던 술)는 없습니다. 메밀로는 도수 낮은 증류주의 또 다른 매력과 지평을 넓혀주었기에 뇌리에 남는 술이었어요. 이번 달은 아쉬운 술이 없습니다. 각자 다른 매력을 지닌 술들이기도 하지만, 특히 아쉽거나 모난 부분이 없이 균형이 잘 잡혀있기 때문이에요.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은 나에게 꿈을 주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은 슬프다고 했죠. 노래는 쓸쓸하게 끝나지만, 주방장은 언제나 돌아오는 이 계절의 막바지이자 겨울의 초입이 되면 이룰 수 있는 꿈을 시작하게 됩니다. 공간이 주는 힘을 믿고 그 빈 공간을 한국의 술과 음식, 그리고 멋진 사람들의 이야기로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