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한 꾸준함으로 주방장이 소개하는 한국술
작년 월간 주방장 1주년을 맞이하면서 든 생각은 '꽤 꾸준히 써왔구나'였어요. 그리고 2주년을 맞이한 지금, 오히려 '아직 멀었으니 더 꾸준히 기록해야겠다'는 마음이 듭니다. 이슬아 작가가 어느 칼럼에서 '재능은 선택할 수 없지만, 꾸준함은 선택할 수 있다'라고 이야기한게 생각나요. 그러고보면 월간 주방장도 매달 맞이하는 선택한 꾸준함으로 쌓아오고 있어요. 술을 빚을 때도 꾸준히 자주 정성을 쏟는 술이 더 맛있는 것처럼 이 시리즈도 아직 스물네 개의 글밖에 모이지 않았지만, 차곡차곡 쌓아간다면 한국술의 스펙트럼을 소개하는 데이터베이스가 되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2020년 9월호에서는 전국에 숨어있던 토박이 막걸리와 1주년을 맞이한 술, 그리고 한국산 사이더라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나가고 있는 한국술을 소개합니다.
처음에 한 달에 한 번 쓰는 글이 별거냐라고 생각했지만, 꽤 '별거'였습니다. 모니터 너머 알 수 없는 독자들과의 약속과 개인적인 책임감이 사명감을 가지게 만들었어요.
-2019년 월간주방장 9월호 중에서
대대로 그 땅에서 나서 오래도록 살아 내려오는 사람을 '토박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막걸리에도 토박이가 있는 것 아시나요? 유통망을 전국구로 넓히기보다는 근접지역에서만 판매되어 오랫동안 지역민들에게 사랑받는 지역 막걸리, 일명 토박이 탁주들이 있는데요. 강원도에서는 동해시의 송정 동동주가 그런 탁주입니다. 노란색과 초록색의 레트로 한 라벨 위에 존재감 넘치게 크게 동동주라고 적혀있는 이 술! 이름은 동동주지만 사실은 부유물 없는 7도의 일반 생탁주입니다. 원래는 3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쌀알이 동동 떠있는 동동주(부의주) 형태였으나 병입 된 술에 들어있는 쌀이 이물질로 분류되어 일반 탁주 형태로 판매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제법 바스락한 가을 냄새가 나던 9월 중순, 지인의 소개로 강원도 동해에서 유명한 송정 양조장을 찾았습니다. 최근 들어 오래된 양조장들에 관심이 많던 차에 동해 송정 양조장이 3대째 이어서 지역민들의 토박이 술을 책임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떠났습니다. 양조장에 도착하자마자 당일 병입 한 동동주를 마셨는데 정말 잊을 수 없는 맛이었어요. 걸리는 것 하나 없이 깔끔하고 드라이해서 적당히 피어오르는 탄산까지 밸런스를 잘 잡고 있어서 탄성을 자아냈습니다. 다른 공장식 막걸리와의 차이점으로는 술을 입에 처음 댔을 때 느껴지는 누룩의 향이었습니다. 익숙한 누룩의 맛이 처음부터 끝까지 입안에 감돌며 탁주의 면모를 뽐냈습니다. 요즘은 찾아가는 양조장처럼 지역에서 인기 있는 양조장들도 많지만, 한 지역에서 3대나 이어지는 유서 깊은 양조장들의 토박이 술들도 있으니, 역사를 따라 방문해보는 것도 추천드려요. 한 지역에서 3대나 이어서 내려오며 지역민들의 사랑을 받는 술이라면 그 이유가 있겠죠?
한강주조의 나루생막걸리 출시 1주년을 맞아 익숙한 듯 새로운 술이 도착했습니다. 나루생막걸리 1주년 에디션 탁주입니다. 이번에 소중히 보내주신 1주년 기념 에디션 탁주는 기존의 나루생막걸리 6도보다 입촉감(입과 혀에서 머무는 질감)과 맛 그리고 향이 굉장히 진하고 무거웠습니다. 실제로 병입 된 술들을 비교해보더라도 가라앉는 부유물 양이 무려 두 배 이상 차이 나는걸 눈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따를 때부터 묵직하고 끈적한 질감이 확연히 드러났는데, 기존의 나루 생막걸리는 부드럽고 가벼운 쌀의 맛을 달콤하게 풀어냈다면 1주년 에디션은 쌀 본연의 농밀한 구수함을 최대치로 끌어올린 것 같았습니다. 너무 맛있어서 한강주조측에 문의해보니 약 15도의 원주로 2달 숙성을 하셨다고 합니다. 여느 나라 술에서도 이런 묵직한 술은 잘 보지 못했는데, 6도 버전에서 느껴지지 않던 산미까지 도드라져서 정말 맛있게 한 병을 금세 비웠습니다. 약간의 산미에 이어 뒤따라오는 달콤함이 잔에 남은 막걸리의 흔적처럼 긴 여운을 남겼어요. 나루생막걸리의 1주년 정말 축하드리며, 또 다른 재미를 선사할 새로운 후속 라인이 등장하길 기대합니다.
최근 국내 사이더(혹은 시드르, 시드라) 시장을 들썩이고 있는 사이더리 찾아 충주를 찾았습니다. 사과로 유명한 충주에 위치한 댄싱사이더 양조장에서는 애플사이더 3종을 비롯하여 오미자+애플사이더인 요세로제까지 재치 있고 특색 있는 사과 발효주를 만들고 있는데요. 그중에서 주방장의 취향을 제대로 저격했던 녹색 라벨의 <더 그린치:Da Green chi>를 소개합니다. 홉 향이 짙은 에일 맥주와 상큼한 사이더를 블렌딩 해서 마시는 것 같았고, 라벨에 그려진 익살스러운 캐릭터같이 오묘한 재미를 선사해주는 사이더였어요. 4.5도의 더 그린치는 홉 자체의 쌉싸래함과 사과의 상큼하고 달큰함이 흥미로운 맛의 조합을 만들어내는데, 청사과와 홉의 조화를 통해 드라이함과 상큼함이라는 극단적인 맛의 합의를 이끌어냈습니다. 그래서 호불호가 꽤 갈릴 것 같기도 해요. 에일 맥주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극호겠지만, 깔끔한 라거나 샴페인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묘한 홉향 때문에 어색하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새로운 술에 도전하기 좋아하는 분이라면 마시는 재미가 있는 사이더이기에 강력히 추천드립니다.
익숙한 사이더 맛에 가장 가까웠던 버전은 파란 라벨의 댄싱파파였습니다. 단맛과 상큼함, 시원함과 약간의 알코올취가 완벽히 밸런스를 갖추고 있었고, 사이더 특유의 깔끔한 피니시가 좋았어요. 양조장에서도 오리지널 애플 사이더라고 소개할 만큼 사과의 풍미는 그대로지만 질리지 않게 단맛은 적당히 유지했고, 7도로 깔끔한 취기까지 돌게 하는 댄싱파파! 근엄한 아버지도 춤추게 할 술이라는 설명에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사과즙을 발효시켜서 만드는 시드르는 자칫하면 심한 산미 혹은 콤콤한 알코올취가 느껴질 수도 있는데 댄싱사이더의 사이더들은 전반적으로 상쾌하고 깔끔함을 지니고 있어요. 충주산 사과 중에서도 부사 품종만을 이용해 만드는데, 부사로 만든 시드르는 보통 외국에서는 '럭셔리 라인'으로 여겨진다고 합니다. 운이 좋게도 국산 사과 품종 대부분이 부사이기 때문에 고퀄리티의 맛있는 사이더를 마실 수 있다는 사실! 한국산 와인 시장이 커가는 만큼 같은 과일 발효주인 사이더도 애주가들의 관심과 사랑을 먹고 더 커지길 기대해봅니다.
강렬한 분홍 라벨의 스윗마마는 셋 중에 가장 달달한 사이더로 갈증 날 때 음료수처럼 시원하게 벌컥벌컥 마시고 싶은 사이더입니다. 초록색 사과나무 사이더(ㅅㅓㅁㅓㅅㅡㅂㅣ)와 가장 유사하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평소 독한 술이나 알코올취에 거부감을 느끼는 분들에게 추천드립니다. 재밌는 사실은 스윗마마는 5.5도로 더그린치보다 도수가 더 높은 편인데 높은 당도 때문인지 더 약하고 가볍게 느껴집니다. 참고로 댄싱사이더의 사이더에는 한 병에 사과 2개 분량의 사과즙이 들어간다고 하는데, 정말 사과 본연의 풍미가 제대로 느껴질 수밖에 없겠어요! 개인적으로 뒤에 끈적하게 남는 당도가 약간은 부담스러웠지만, 맥주가 취향에 따라 갈리는 것처럼 사이더도 각자의 취향에 따라 골라 마시는 재미를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강원도와 충주를 가로지르며 재밌고 맛있는 술들을 찾아다닌 9월, 어느새 9월호를 세 번째 쓰고 있습니다. 월간 주방장은 독자를 위한 글이기도 하지만, 주방장을 위한 글이기도 합니다. 새로운 술을 더 마시게 만드는 동력이이며, 아무 생각 없이 새로운 술을 마시다가도 메모장을 켜고 감상을 남기게 만들기 때문이에요. 가끔 새로운 술을 검색했을 때 월간 주방장이 상위 검색 기록으로 뜨고, 자주 찾아와서 읽어주시는 것을 보면 뿌듯함을 감출 수 없습니다! 한국술의 위키피디아같은 데이터베이스가 될 수 있도록! 어떤 술이 궁금할 때 평가와 정보, 그리고 새로운 이야기를 얻어갈 수 있도록! 주방장이 선택한 꾸준함으로 월간 주방장은 계속됩니다. 다음달에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