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약주, 부재료 이야기
누구와도 잘 어울리지만 크게 특징이 없는 S는 대중적이긴 하지만 밋밋하고 그만의 향이 없다. 반대로 다면적 매력을 지닌 Y는 특정 성격과 만났을 때 특별한 케미를 만들며 조화를 이룬다. 여기서 Y는 약주, S는 소주다. 그렇다면 대입해보자. Y처럼 약재나 가향재를 넣어 다면적인 술을 우리는 약주(藥酒)라 부르고, 다양한 향을 내주기 위해 힘써주는 이들을 부재료라 한다.
대체적으로 우리나라 전통술은 신맛을 배제하고 단맛만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지만, 향에 있어서는 다르다. 향 자체만으로도 다양한 <한약향>을 지니고 있어, 단조로운 음식과 먹기보다 복잡한 향의 향신료를 이용해 조리한 중국이나 동남아 음식*과도 제법 어울린다. 술에도 개성이 있기 때문에 약주가 소주의 길을 걸으려 해서는 옳지 않다. 특별한 음식으로 어울리는 개성을 찾기 바란다.
'와인 한 잔 하자'라는 말에 와인 대신 전통주나 약주를 넣으면 어떨까. 왠지 모르게 어색하고 생소하겠지만, 약주라는 말은 우리나라에서 오래전부터 사용되어 왔다. 술을 대신해 높여 부르는 말을 일컫기도 하는데, 자신의 품격을 더 높일 수 있는 말이니 어색해말고 외쳐보고 시작해보자.
"약주 한 잔 하시겠습니까?"
*중국, 동남아의 전통주 역시 우리와 같이 다양한 향을 지닌 약주다.
기존의 약주는 곡식으로 술 빚고 에탄올을 첨가할 수 없는 형태였으나, 2011년 주정을 넣을 수 있게 바뀌었다. 따라서 이제는 곡식과 누룩을 이용한 전통방식의 청주뿐 아니라, 여러분이 건강을 위해 꽁꽁 감춰둔 약재 및 재료들을 술에 양보해 만들어진 술 또한 약주로 분류될 수 있어진 것이다.
#약주의 의미는 일반적으로 다섯 가지로 정의할 수 있다.
1. 주세법상 약주의 정의(곡식으로 빚고 식용 에탄올을 첨가할 수 있는 양조주)
2. 진짜 약재를 넣어 빚는 술(당귀주, 인삼주, 하수오주, 맥문동주, 두충주 등)
3. 약재가 들어있지는 않지만 약으로서 마시는 술
4. 금주령을 피하기 위해 양반들이 사용하며, 술을 대신해 높여 부르는 말
5. 인조 때의 정치가 약봉 서성(徐敵)이 약현에 살며 좋은 술을 빚었고, 그 집의 술을 부르는 말(약산춘)
다섯 가지의 약주 의미 중 우리가 가장 흔하게 생각하는 의미로는 진짜 약재를 넣은 술이지 않을까 싶다. 산 좀 다니신다는 분들께서 귀한 술이라며 신줏단지 모시 듯 약재를 넣고 숙성시킨 술들은 고문서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고문서에서 찾아본 약주
우리나라의 약주를 포함한 전통주는 중국술이나 보드카처럼 독하다거나 일본술처럼 섬세하지는 않으나 향이 은은하고, 색이 아름다우며, 다른 나라와 동일 도수라도 부드러운 것이 특징이다.
고려도경(1123), 산가요록(1450), 수운잡방(1500년대 초), 동의보감(1611), 지봉유설(1613), 고사촬요(1613), 유원총보(1644), 음식디미방(1670), 요록(1680), 주방문(1600년대 말), 산림경제(1715), 음식보(1700), 증보산림경제(1766), 규합총서(1815), 양주방(1837), 술방문(1861), 조선무쌍(1936) 등
고려도경에 의하면 고려에는 탁주와 청주가 있었다고 하며, 여기에서의 청주를 조선시대에는 또 약주라 불렀다고 한다. 당시 약주라는 단어가 사용된 문헌들은 종종 찾아볼 수 있지만,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기에 약용주였는지는 임원십육지라는 기록을 알기 전까진 알 수 없었다. 처음으로 임원십육지에서 찹쌀로 빚었다는 기록이 나오며, 이후 다양한 종류를 확인할 수 있다.
#한약향 우리술
다양한 약재를 이용해 빚는 술은 예로부터 그리고 지금까지도 다양하게 빚어지고 있다. 허준의 동의보감에는 '약 기운 돌게 하는 데는 술보다 좋은 것이 없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아마 이것이 바로 약이 되는 술, 진짜 약주가 아닐까 생각한다. 단, 아무리 몸에 좋은 약재라고 하더라도 술 빚을 때 너무 많이 넣지는 말자. 향이 너무 강하게 띄면 거부감이 들 수도 있고, 많이 넣게 되어 효능은 좋을 수 있어도 일단은 술이다.
전 세계에는 약재(가향재)를 넣어 술을 빚는 양조문화가 나라마다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처럼 사계절이라는 뚜렷한 변화에 맞춰 꽃이나 잎, 과실의 껍질, 생약재를 이용한 나라는 드물 것이다. 봄에 꽃이 피면 꽃으로, 여름에 잎이 무성해지면 잎으로, 가을에는 풍성하게 열린 열매와 뿌리로 다양한 술이 빚어졌다.
#꽃으로 빚는 술
복숭아꽃을 곁들인 도화주, 국화꽃을 이용한 국화주, 진달래꽃의 두견주, 연꽃의 연화주 그리고 백 가지의 꽃을 넣어 빚었다는 생각만으로도 설레는 백화주百花酒까지 이외로도 다양하다. 엄동설한에 반쯤 핀 설중매를 비롯해 1년 동안 피는 수많은 꽃들은 모두 술의 재료가 될 수 있다. 단, 철쭉꽃, 옥잠화, 싸리꽃 등은 독이 있으니 술 빚기에 적합하지 않으니 주의하자. 자세한 내용들은 <꽃으로 빚는 가향주 101가지>를 참고해도 좋다.
#백화주 빚기 본 레시피는 한국가양주연구소에서 직접 배운 레시피 임을 밝힙니다.
술 빚기 전 모든 도구와 손은 항상 꼼꼼히 소독할 것을 당부드리며 <씨앗술 - 밑술 - 덧술>로 진행된다.
<씨앗술>
1. 쌀가루 300g을 체 쳐 준비한다.
2. (1)에 팔팔 끓는 물 1리터로 범벅을 만들어주고 뜨겁지 않을 정도로 식힌다.
3. 누룩 600g을 잘게 부숴 (2)의 식힌 범벅에 섞어 씨앗술을 만든다.
4. 3일 정도 발효시킨 뒤 사용한다.
*씨앗술은 밑술을 실패하지 않기 위해 안정된 발효를 도울 수 있도록 만드는 방법이다.
<밑술>
5. 체 친 멥쌀가루 2kg을 끓는 물 8리터와 혼합해 범벅한다.
6. 잘 섞은 범벅을 고루 식혀준 뒤 <씨앗술>과 섞어 용기에 담아 2일 정도 발효시킨다.
<덧술>
7. 잘 불린 찹쌀 6.3킬로를 고두밥을 찌고, 고루 펴서 식힌다.
8. 식히는 동안 용기에서 담았던 <씨앗술+밑술>을 꺼내어 거름망에 지게미를 거른다.
9. 고두밥을 걸러준 (8)에 넣어 덩어리 지지 않게 잘 풀어준다.
10. 마지막으로 잘 마른 백화 20g을 넣고 조심스레 섞는다.
3주 정도 술이 잘 익어가는 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맑은술이 위로 오르는 때를 잘 관찰한다.
약주라고 해서 '약藥'이 꼭 쓰디쓴 약이 들어가야만 하는 술이란 법 없다. 오늘 글의 제목처럼 여러분이 좋아하는 꽃도 하나의 술의 부재료가 될 수 있다. 기념일이면 서로 챙기는 꽃, 한 번쯤은 서로의 연인과의 기념일을 추억하며 빈티지 와인처럼 특별하게 빚어보면 어떨까?